고전문학

<사노친곡>(사로친곡) 상세 해설 및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검토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9. 03:27

 

다음은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학습QnA> 게시판에 올라온 수험생의 질문과 강사(혹은 게시판 담당자)의 답변입니다. 한번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BS 언어영역 강의와 교재 그리고 질문 답변의 실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수험생의 질문>

 

[교재내용 관련7강 46쪽 4번] 질문 작성자 : 김**

4번에 5번이 적절하지 않으므로 답이되는거잖아요. 그니까 이 작품에는 장애물이 없다고 되어있는거자나용. 근데 '적리'는 장애물이 아닌가요? 유배간 상황이 장애가 된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요?

 

 

 

<강사의 답변>

아무래도 고전작품 해석하기가 좀 어렵죠^^ 그래도 고전작품은 '다다익선' !! 많은 작품을 접하면 접할 수록 실력이 늘게 되어있습니다.^^

<제3수>의 시적화자의 정서는 고향에 가고 싶지만, 막상 가서 고향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제4수>에서는 단순히 고향을 가고 싶은 간절함을 노래한 거구요~ 그래서 <제3수>에 나오는 시적화자의 정서를 구체화했다는 점이 틀린 겁니다. 물론 학생님의 의견대로 유배지가 공간적 장애물의 역할은 합니다. 하지만 시간적 장애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해되시나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EBS에 제시된 해당 지문과 문제 그리고 해설>

 

 

(1) 지문과 어구 해설

 

길이 멀다하다 나면 아니 가랴터냐 / 말이 파리하다 타면 아니 네라터냐

가고난 후면 노모 귀령(歸寧)할 일이지만

천진우위(遄臻于衛)인마는 불하유해(不瑕有害)라 이를 저어 하노라

 

-<제3수>

 

 

적리(謫裏) 광음(光陰)은 사 년이 벌써 되고 / 천외가향(天外家鄕)은 만 리에 아득하니

몸이 못 가거든 기별(奇別)이나 들었으면 / 아무리 척흘첨망(陟屹瞻望)을 말랴한들 얻을손가

 

-<제4수>

 

-이담명, ‘사노친곡(思老親曲)’

 

 

* 귀령(歸寧) : 편안히 돌아가심.

* 천진우위(遄臻于衛)인마는 불하유해(不瑕有害) : 시경의 한 구절. 빨리 집에 이를 수 있지만 어떤 해가 있지 않을까.

* 적리(謫裏) : 유배지에서.

* 천외가향(天外家鄕) : 천 리 밖의 집과 고향.

* 척흘첨망(陟屹瞻望) :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봄.

-EBS 수능 특강 45쪽

 

 

(2) 문제

4. (다)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⑤ <제4수>에서는 특정 시간과 공간을 장애물로 설정하여 <제3수>에 제시된 화자의 정서를 구체화하고 있다.

 

 

(3) 해설

<제3수>의 종장에서는 빨리 집에 이를 수도 있지만, 어떤 해가 있을까 두려워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제4수>에서는 유배지에서 4년의 시간이 흘렀고, 고향이 만 리나 떨어졌다는 것을 통해 고향으로 가기 힘든 자신의 처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특정 시간과 공간을 장애물로 설정해 <제3수>의 화자의 정서를 구체화하고 있지 않다.

 

 

[참고] ④번 답지 해설

<제3수>에서 ‘길이 멀다고 나서며 아니 가겠느냐’, ‘말이 파리하다고 타면 아니 가랴더냐’는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만나고 싶어 하는 화자의 심정을 나타낸다.

 

 

 

 

<의문과 문제점 검토>

 

(1) 제시된 작품 지문 및 어구 풀이 검토

 

 

의문 ① : 이 작품은 연시조입니다. 그런데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에 지문으로 제시된 것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제3수와 제4수가 4장 형식(네 줄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마치 한시(漢詩) 절구(絶句)를  번역해 놓은 것 같습니다. 시조는 대개 3장 형식인데 말입니다. 역시 확인해 본 결과 교육방송의 것이 엉터리였습니다. 우선 원문의 구성은 최소한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합니다.

 

 

길이 멀다하다 나면 아니 가랴터냐

말이 파리하다 타면 아니 네라터냐

가고난 후면 노모 귀령(歸寧)할 일이지만 천진우위(遄臻于衛)인마는 불하유해(不瑕有害)라 이를 저어 하노라

-<제3수>

 

적리(謫裏) 광음(光陰)은 사년이 벌써 되고 천외가향(天外家鄕)은 만 리에 아득하니

몸이 못 가거든 기별(奇別)이나 들었으면

아무리 척흘첨망(陟屹瞻望)을 말랴한들 얻을손가

-<제4수>

-이담명, ‘사노친곡(思老親曲)’

 

 

 

 

의문 ② : ‘네라터냐’가 문맥상의 흐름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해석하면, ‘너라고 하더냐’ 정도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를 교육방송 강사는 ‘가랴더냐’로 해설합니다. 그러나 ‘네’는 ‘너가’ 또는 ‘너의’라는 뜻이지, ‘가다’라는 뜻의 어휘가 아닙니다. 원문을 확인해 보니, ‘녜라터냐’입니다. 역시 교육방송의 것이 엉터리였습니다. ‘녀다’는 ‘다니다’의 뜻으로 쓰였던 말입니다. 또 ‘녜다’는 ‘가다, 행하다’의 뜻으로 쓰였던 말입니다. 당연히 ‘녜라터냐’로 수정해야 합니다.

 

 

 

의문 ③ : ‘가고난 후면’도 그럴 듯해 보이지만, 원문과는 거리가 먼 옮김입니다. 원문은 ‘가고 녠 後ㅣ면’입니다. 이것을 황충기 선생님(저서의 약력을 보니 개포고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의 책에서는 ‘가고 또 간 뒤에는’으로 풀었습니다. 이게 더 적절하다는 것은 의문 ②의 ‘녜다’에 대한 설명을 통해 보더라도 분명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것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간단히 설명하자면, ‘집에 다녀간 후라면’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가고 녠 後면’ 정도로 수정해야 합니다.

 

 

 

의문 ④:‘천외가향(天外家鄕)’의 뜻풀이와 강사의 강의에 대한 의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조소(嘲笑)를 금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를 교재의 어구풀이는  ‘천 리 밖의 집과 고향’이라고 풀이해 놓았고, 강사는 이를 ‘천 리 밖의 고향은 만 리에 아득하니’라고 해설합니다. 우선 이런 지적은 하기도 면괴(面愧)합니다만, ‘천(天)’과 ‘천(千)’을 혼동한 것입니다. 이를 몇 주 전에 EBS에 지적했습니다만, 아직도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코미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는 교육방송의 권위에 짓눌린 많은 학원 강사들에 의해 교사들에 의해 날이면 날마다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제 말이 과장 같으면, 한 번 인터넷을 검색해 보십시오, '천외가향'이라고,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교육방송 교재를 그대로 베껴서 학생들을 오도하고 있는 글이 얼마나 많은지? 꼭 한번.  제가 다소 흥분하여 이런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육, 참 좋은 일입니다만, 조금만 잘못 나가면 바로 옆에 '사기'가 있는 것입니다. 교육자가 사기꾼되는 것 금방입니다.  

 

 

또 엄밀하게 말하면 ‘가향(家鄕)’을 ‘집과 고향’이라고 풀이하는 것도 수준 낮은 것입니다. ‘가향(家鄕)’은 그런 뜻의 단어가 아니라, ‘자기 집이 있는 고향’이라는 뜻의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작자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란 의미에서 그냥 ‘고향’이 그리운 것이 아닙니다. 이담명은 이 시조를 지을 당시 큰 죄를 지어 서로(西路) 지역[‘서로(西路)’는 흔히 ‘서도(西道)’라고도 하는데, 황해도와 평안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작자는 평북 북서쪽에 있는 군(郡)인 창성에 유배를 간 상태였습니다.]에 유배가 있는 처지였고, 아버지는 처참하게 죽었고, 홀로 남은 노모(老母)가 영로(嶺路) 지역[영남 지역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경북 칠곡군입니다.]에 있었습니다. 노모가 살고 있는 집이 있는 고향을 그리워한 것인데, 그래서 ‘가향(家鄕)’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집은 한양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하늘 밖처럼 느껴지는) 머나 먼 가향(家鄕)’ 정도로 풀이를 수정해야 합니다.

 

 

[참고] 제2수의 ‘친년(親年)’의 뜻풀이 ‘부모의 나이’도 그 자체로는 무리가 없으나, 문맥적으로는 ‘모친의 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75세’라는 나이 언급과 잘 어울립니다. 작자의 선친은 죽임을 당한 처지였고, 노모만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의문 ⑤ : ‘귀령(歸寧)’이 뭐죠? 여기서 ‘寧’은 ‘편안할 령(영), 편안할 녕(영)’ 자(字)입니다. 그런데 그 표기가 ‘귀령’이 맞을까요? 아니면 ‘귀녕’이 맞을까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귀녕(歸寧)’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귀령’으로 적어도 되지 않나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승낙(承諾)’이라고 쓰기도 하고, ‘수락(受諾)’이라고 쓰기도 하며, ‘안녕(安寧)’이라고 쓰기도 하고, ‘의령(宜寧)’이라고 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寧’의 본음은 ‘녕’이고, 속음(俗音)이 ‘령’입니다. [이상 한글맞춤법 제52항 관련입니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귀녕’을 취했습니다. 당연히 ‘귀녕(歸寧)’으로 표기해야 온당합니다.

 

그리고 ‘귀녕’의 사전적 의미는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부모를 뵘’입니다. 그렇지만 교육방송의 뜻풀이 ‘편안히 돌아가심’은 무난합니다. 문맥상 ‘(유배간 자식이 한번 왔다 가면) 노모가 돌아가실 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할 일이지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모친의 돌아가심을 언급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삼가야 할 것이지만, 연세가 이미 고희(古稀)를 넘었고, 그 마음을 부모의 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참고] 제목은 고유명사이니 별도 문제일 수 있는데, '탄로가', '경로사상'이라고 하므로 '사노친곡'보다는 '사로친곡'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의문 ⑥:‘천진우위(遄臻于衛)인마는 불하유해(不瑕有害)’의 해석 문제. 이 부분은 시경(詩經)에서 따온 구절입니다. 제가 시경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책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 봤습니다.  

 

 

샘물(泉水)

 

 

毖彼泉水 亦流于淇 콸콸 흐르는 저 샘물도 기수로 흘러드는데

有懷于衛 靡日不思 위나라가 그리워 하루도 생각 않는 날 없으니

孌彼諸姬 聊與之謀 예쁜 내 하녀들과 돌아갈 일을 의논해 보네

 

出宿于泲 飮餞于禰 제수 가에 와서 묵고, 예수 가에서 작별했었지

女子有行 遠父母兄弟 여자가 시집을 가면 부모형제와도 멀어지는 것

問我諸姑 遂及伯姊 고모들에게 안부 여쭙고 언니들도 만나고 싶네

 

出宿于干 飮餞于言 간땅에 가서 묵고 언땅에서 작별하고

載脂載舝 還車言邁 기름치고 굴대빗장 꽂고 수레를 돌려 달려가면

遄臻于衛 不瑕有害 바로 위나라에 다다를 테니 안 될 것도 없으련만

 

我思肥泉 玆之永歎 나는 비천을 생각하고 긴 한숨 짓고

思須與漕 我心悠悠 수땅과 조땅을 생각하니 시름만이 그지없네

駕言出遊 以寫我憂 수레 타고 나가 놀며 내 근심이나 풀어볼까

 

 

밑줄 친 부분이 인용된 부분입니다. 약간 해석이 다릅니다. EBS 교재에서는 “빨리 집에 이를 수 있지만 어떤 해가 있지 않을까.”라고 해석했습니다. 전반부의 해석에서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후반부는 어떤가요.

 

‘不 : 아닐 부, 아닐 불 / 瑕 허물 하 / 有 있을 유 / 害 해할 해’입니다. ‘허물이 아니나 해가 있을까’ 정도가 어떤지요. 이 부분은 제 깜냥으로는 정확한 판단을 못 내리겠습니다.

 

 

의문 ⑦ : ‘척흘첨망(陟屹瞻望)을 말랴한들 얻을손가’의 문제. 원문에는 ‘얻을손가’가 ‘어들손가’로 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얻을손가’로 고치는 것이 적절한가입니다. 문맥을 보면,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 가향을 멀리 쳐다보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지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정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얻을손가’라고 하면 문맥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어찌하겠는가’ 정도의 뜻으로 보이므로, ‘어들손가’가 더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울러서 이담명의 <사노친곡> (사로친곡)전체를 살펴보니, 끝소리에 ‘ㄷ’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ㅅ’은 나타나는데 말입니다. 즉 ‘얻다’의 연철 표기로 보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상의 결과를 바탕으로 EBS의 지문과 어구 해설을 제 나름대로 수정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길이 멀다하다 나면 아니 가랴터냐 / 말이 파리하다 타면 아니 녜라터냐

가고 녠 후면 노모 귀녕(歸寧)할 일이되 천진우위(遄臻于衛)언마는 불하유해(不瑕有害)라 이를 저어 하노라

-<제3수>

 

 

적리(謫裏) 광음(光陰)은 사년이 벌써 되고 천외가향(天外家鄕)은 만 리에 아득하니

몸이 못 가거든 기별(奇別)이나 들었으면 / 아무리 척흘첨망(陟屹瞻望)을 말랴한들 어들손가

-<제4수>

-이담명, ‘사로친곡(思老親曲)’

 

* 귀녕(歸寧) : 편안히 돌아가심.

* 천진우위(遄臻于衛)언마는 불하유해(不瑕有害) : 시경의 한 구절. 빨리 고향에 이를 수 있을 같고, 그것이 허물이 아니나 해가 있을까.

* 적리(謫裏) : 유배지에서.

* 천외가향(天外家鄕) : (하늘 밖처럼 느껴지는) 머나 먼 가향(家鄕).

* 척흘첨망(陟屹瞻望) :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봄.

 

   

(2) 문제 및 답지, 그리고 <학습QnA> 검토

 

 

의문 ① : <정답 및 해설>(20쪽)의 적절성 여부. 앞서 제시했습니다만, 답지 ⑤와 그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⑤ <제4수>에서는 특정 시간과 공간을 장애물로 설정하여 <제3수>에 제시된 화자의 정서를 구체화하고 있다.

-수능특강 언어영역 문학 45쪽

 

 

<제3수>의 종장에는 빨리 집에 이를 수도 있지만, 어떤 해가 있을까 두려워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제4수>에서는 유배지에서 4년의 시간이 흘렀고, 고향이 만 리나 떨어졌다는 것을 통해 고향으로 가기 힘든 자신의 처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특정 시간과 공간을 장애물로 설정해 <제3수>의 화자의 정서를 구체화하고 있지 않다.

 

 

[참고] ④번 답지 해설

<제3수>에서 ‘길이 멀다고 나서며 아니 가겠느냐’, ‘말이 파리하다고 타면 아니 가랴더냐’는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만나고 싶어 하는 화자의 심정을 나타낸다.

-수능특강 언어영역 정답 및 해설 20쪽

 

 

 

아무리 좋게 봐도 요령부득(要領不得)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해설입니다. 해설의 초점은 당연히 ‘특정 시간과 공간을 장애물로 설정하여’의 적절성 여부(與否)에 맞춰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잔뜩 선소리를 하다가 막판에 이르러 “답이 아니니 답이 아니다.”라는 식의 허망한 해설로 끝내고 있습니다. [이런 허망한 해설이 수능특강 언어영역 강의와 교재에 전체적으로 허다함. 작년 인터넷 수능 시리즈의 경우 더 문제가 많았는데 정말 기대됨. 나중에 해설해 드릴게요.]

 

 

우선 왜 제가 선소리라고 비판하는지 이유를 밝혀 보겠습니다. 과연 작자가 “빨리 집에 이를 수도 있”는 처지였던가요? 조선왕조실록을 한번 살펴보세요. 당시 이담명에 대한 비판이 조정(朝廷)에서 얼마나 들끓었는지 말입니다. 이담명은 과거에 합격할 때부터, 그 아버지의 비리에 연루되어, 불합격시켜야 한다고 엄청나게 시끄러웠습니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도 더 심하게 처벌하라는 상소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뭐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작자는 지금 적소(謫所)에 있습니다. 어떻게 “빨리 집에 이를 수도 있”겠습니까? 시쳇말로 유배가 장난입니까?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건대, “천진우위(遄臻于衛)언마는”(교재에는 -인마는)을 그렇게 해석한 모양이지만, 명백한 오독(誤讀)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는 금방 다다를 것도 같지만’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더 문제입니다. 해설의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이 논리적으로 적절합니까? 유배지에 있다고 했습니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공간과 시간을 다 적시한 셈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특정 시간과 공간을 설정해’라는 구절을 반박하는 근거가 됩니까? 전형적인 자가당착(自家撞着)이요 이율배반(二律背反)입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4번에 5번이 적절하지 않으므로 답이되는거잖아요. 그니까 이 작품에는 장애물이 없다고 되어있는거자나용. 근데 '적리'는 장애물이 아닌가요? 유배간 상황이 장애가 된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요?”이라고

 

 

 

제가 판단할 때, 질문한 수험생이 집필자나 강사보다 훨씬 똑똑합니다. 비록 표현은 거칠지만, 얼마나 정곡(正鵠)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입니까? 집필자와 강사 모두, 저 같은 사람이야 무시해도 되지만, 수험생들의 수많은 눈과 귀를 정말 두려워해야 합니다. 저 역시 관련된 사람들이 몹시 기분 나빠할 것을 알면서도 이 글을 씁니다. 정말 두렵습니다. 오류가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블로그에 올린 글 말고도 교재나 강의 수정한 것 많습니다. 그 중 근거가 너무나 확실한 것, 분명히 내 눈으로 자료를 검토한 것만 올리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까지 다 올리면 지금 올린 글의 3배는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방송의  경우 전국에서 엄청난 수의 수험생이 보는 교재이고 강의입니다. 그 중에는 정말 사계의 전문가를 부형으로 둔 수험생도 많습니다. 제 주변에도 한문으로 작문이 가능한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질문 안 할 것 같습니까? 조롱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겁을 상실한 만용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문제 잘 푸는 학생 수준의 실력으로 강의하고, 몇 년 간의 강의 경험으로 수능 문제 출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위리안치> 그림

 

 

 

다시 논의의 본류로 돌아갑시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본적으로 유배(流配)라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입니다. 활동 영역을 특정 지역으로 제한한다는 점에서 공간의 문제이고[이 경우 위리안치(圍籬安置)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기간을 특정(特定)한다는 점에서 시간의 문제[물론 무기(無期)도 가능하지만]인 것입니다. 작자가 느끼는 안타까움의 8할은 유배라는 문제에서 기인(起因)한 것입니다. 이를 어찌 반박할 생각입니까?

 

 

그러면 <학습QnA>의 강사 답변은 어떤지 검토해 봅시다.

 

 

<제3수>의 시적화자의 정서는 고향에 가고 싶지만, 막상 가서 고향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제4수>에서는 단순히 고향을 가고 싶은 간절함을 노래한 거구요~ 그래서 <제3수>에 나오는 시적화자의 정서를 구체화했다는 점이 틀린 겁니다. 물론 학생님의 의견대로 유배지가 공간적 장애물의 역할은 합니다. 하지만 시간적 장애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해되시나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이러면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좀 비꼬는 투로 비판하겠습니다. 위의 답변에서 설득력이 있는 말은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뿐이군요. 두서없이 엉터리로 설명해 놓고 수험생에게 아주 당조짐을 하는군요. “이해되시나요?”라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십시오. 당신이라면 이런 허섭스레기 비슷한 답변으로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우선 “시적화자의 정서는 고향에 가고 싶지만, 막상 가서 고향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는 마음입니다.”가 무슨 말입니까? ‘고향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가’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작품의 내용 구조를 좀 꼼꼼하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답변하길 바랍니다. 에고, 또 “<제4수>에서는 단순히 고향을 가고 싶은 간절함을 노래한 거구요~”라고요. 이건 또 무슨 망발입니까?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옵니다. 제4수의 내용이 얼마나 구체적인데, 그런 식으로 ‘단순히 고향 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런 허접스러운 기준으로 제3수와 제4수를 대조(對照)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수많은 우리 사랑하는 수험생들을 위해,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괜한 민폐 끼치지 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의 큰딸이 내년에 고(高)1이 됩니다. 교육방송 교재를 보고, 강의도 볼 것입니다. 저는 이런 3류 강의에 제 딸을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3수>에 나오는 시적화자의 정서를 구체화했다는 점이 틀린 겁니다.”라고요? 정말요? 도대체 제3수에 나오는 시적 화자의 정서가 뭐죠? 제가 직접 설명하면, 문학 작품 감상은 주관적이라는 둥 허접스러운 변명을 할 테니, 교재의 설명을 따르겠습니다.

 

 

 

[참고] 제가 재작년인가에도 장 모 강사(군대 관련 발언으로 사회적 무리를 일으킨 바로 그 강사)의 오류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늘 논리가 궁하면 관점 차이, 작품 감상의 주관성 운운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바보가 아닙니다. 관점 차이의 문제, 감상의 주관성 문제에 해당하는 것을 문제 제기할 정도로 말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작품 감상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작품 감상은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을 제재로 하는 수능에서는 그런 영역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근대 이후 제도적 장치로서의 학교가 정립되고, 평가는 객관성, 상호주관성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수능 평가에서도 객관성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제 지적도 그런 관점 차이나 주관성 문제와는 무관합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실 엄청나게 많습니다.[ 솔직히 교육방송 교재에 수록된 작품 중 교육적 차원에서 적정성의 한계를 넘는 것도 많습니다.- 저는 이 부분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 그러나 그런 지적으로 논란을 야기할 만큼 제가 아둔하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제가 ‘은세계(銀世界)’는 눈 덮인 강산을 미화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강사의 해설처럼 ‘은(銀)으로 만든 세계’가 아니고.[EBS는 결국 버티다가 끝내 강의를 고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지적하고 있는 오류들도 이런 수준입니다. 도대체 이런 지적과 작품 감상의 주관성 문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당시 수능 N제 시리즈 강의는 더 엉망이었는데, 말 섞기도 싫어서 포기했습니다. 제 주변의 후배가 그러더군요. 그 강사는 형님이 무슨 지적을 해도 이해도 못할 것 같다고요.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봐 주라고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작년 N제 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재작년 것 말하는 것입니다.

 

 

 

<제3수>에서 ‘길이 멀다고 나서며 아니 가겠느냐’, ‘말이 파리하다고 타면 아니 가랴더냐’는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만나고 싶어 하는 화자의 심정을 나타낸다.

 

 

 

교재의 설명이 이래요. 그런데 말이죠. 시적 화자가 제4수에서 뭘 했죠. 유배지에서 시간이 많이 흘러 안타깝다고 했어요. 고향을 생각하면 하늘 밖처럼 만 리에 아득하게 느껴진다고 했어요. 몸이 못 가거든 기별이나 들었으면 한다고 했어요. 높은 곳에 올라가 고향을 바라본다고 했어요. 그것을 누가 말려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시가 이 정도면 구체적이지, 어떻게 더 구체적입니까? 이런 구절에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만나고 싶어 하는 화자의 심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요?

 

 

 

다음, “물론 학생님의 의견대로 유배지가 공간적 장애물의 역할은 합니다. 하지만 시간적 장애물은 나오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이렇게 말해 버리면, 기왕의 교재와 강의와의 정합성 문제는 어떻게 책임을 지실 것인가요? 분명히 정답 및 해설에서는 “특정 시간과 공간을 장애물로 설정해 <제3수>의 화자의 정서를 구체화하고 있지 않다.”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도대체 수험생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합니까? 교재의 설명입니까? 강사의 설명입니까? <학습QnA>의 답변입니까? 대답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래저래 힘없는 수험생만 불쌍합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적 장애물”은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런데 제4수에는 “적리(謫裏) 광음(光陰)은 사년이 벌써 되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에고, 이 일을 어쩌죠? 그게 무슨 뜻인지 친절히 가르쳐 드릴까요? 나 참, 교육방송 선생님을 상대로 이런 수준 낮은 해설까지 해야 하는 제 처지가 정말 딱합니다. 제발 이러지 맙시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벌써 4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여기를 못 벗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어 구속되어 있는 몸이라서! 아직 형기(刑期)가 남아서요! 아직 시간이 다 되지 않아서요!

 

 

당신 말마따나 “이해되시나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 강호제현의 많은 질정 바랍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교육자적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께 조금이나마 졸고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참 그리고 마우스 오른쪽 클릭 가능하도록, 그래서 제 글을 퍼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메일이 왔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것은요. 제가 쓴 글을 저 스스로 읽고 또 읽으면서 오류를 수시로 바로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류가 있는 글이 여기 저기 인터넷에 떠 다니면, 시쳇말로 쪽 팔리잖아요. 죄송합니다.

 

* 모르는 일이긴 합니다만, 어쩌면 이 글들을 EBS 관계자들도 볼 것입니다.

교육방송 대표님과도 일종의 소통을 하고 있고, 실명도 오픈했습니다.

전국의 수험생들을 위해서 저는 당분간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제 지적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제 지적이 옳지 않다고 반박하든지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참고(1)> ‘조선왕조실록’의 이담명 과거 급제 관련 논란

 

 

대사간 남이성이 사직 상소를 통해 과거의 공정하지 못한 폐를 자세하게 논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번 전시의 합격자 이담명(李聃命)의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중두(中頭)와 당금(當今), 편종(篇終)의 세 곳의 성책(聖策) 위에 모두 ‘복독(伏讀)’ 두 자를 빠뜨렸습니다. 여러 시관이 그 문장을 취하려 하다가 규격에 어긋나서 망설이던 차에 시관 이원정(李元禎)이 자기가 과거를 볼 때의 일로 증명하자 여러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어 담명이 마침내 합격하였습니다. 설령 이담명이 격식을 어긴 것이 실로 우연한 실수에서 나왔고 이원정이 증거하여 도운 것 역시 별 사심이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들이 합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때에 아버지가 간여한 일이 있으면 인정과 물의가 놀라고 분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이 듣기로는, 선대의 조정에서는 ‘죄가 응시자에게 있으면 응시자를 벌하고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벌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담명 부자는 국법에 있어서 모두 유죄임이 마땅하여 결코 합격자 명단에 둘 수 없는데, 여러 날을 귀를 기울이고 들어도 아직까지 말을 하는 자가 없으니 신은 의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봉미관 정기태는 여러 지동관(枝同官)·사동관(査同官)과는 각기 맡은 것이 달라서 본래 서로 간여할 일이 아닌데 그 직분을 넘어 침범하였으니 그 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친한 사람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형세가 있는 집안과 교제를 갖고자 하여서일 것입니다. 과거 시험은 일의 체모가 지극히 엄하고 중하여 한 줄기 공도가 여기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인데, 지금 간사한 자에 의해서 무너져버렸으니, 참으로 통분스럽습니다. 더구나 그 시권은 중신 집안 자제의 글이라 하니, 만약 엄히 문책하고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일반 백성들이 틀림없이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구실을 삼아 말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니, 더욱 애통합니다. 신이 생각하기로는 기태는 엄하게 심문하여 실상을 밝혀내고 그 응시자와 함께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성상께서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하시는 것을 밝힐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여러 날이 되도록 답이 없었다. 승지 최일(崔逸)이

“간언하는 신하는 일반 신하와 다른데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자못 거북스럽습니다.”

라고 아뢰었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또 여러 날이 지나서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참고(2)> ‘조선왕조실록’의 이담명 부친 사사 관련 논란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담명(李聃命)이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그의 아비 이원정(李元禎)의 원통함을 변명하기를,

“체찰부(體察府)를 다시 설치하자는 것이 신(臣)의 아비의 평생의 죄안(罪案)이 되었는데, 이 논의로 말하자면 실로 김석주(金錫胄)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의 아비는 김석주에게서 듣고 성상께 아뢴 까닭으로, 신의 아비가 체포되려던 즈음에 김석주가 이르러 자신이 증거하려 한다고 하면서 신의 아비가 귀양갔을 때에 보낸 편지가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국문(鞫問)을 당하게 되자, 김석주는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돌까지 던지며 이남(李柟)과 친밀하였음도 또 신의 아비의 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의 아비와 오정일(吳挺一)은 매우 친하였습니다만 이정(李楨)과 남(柟)은 곧 오정일의 생질인 까닭으로 신의 아비가 혹 서로 알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비난하고 배척하는 말이 있기도 하였으니, 어찌 친밀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정창(吳挺昌)이 오히려 말한 것은 단지 신의 아비가 영남 사람으로서의 시의(時議)에 거스림이 가장 심하였던 까닭으로 그 즐겨 듣기를 바라고서 그랬던 것일 뿐입니다. 아비의 원통함이 비록 신원(伸寃)되었다 하더라도 신은 불충(不忠)하고 불효(不孝)하니,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다시 조정(朝廷)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기를 심히 두텁게 하였다.

 

 

<참고(3)> ‘조선왕조실록’의 이담명 처벌 관련 논란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이 청대(請對)하여, 소매 안에서 차기(箚記)를 내어 바치고,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담명(李聃命)이 조정(朝廷)에 품의(稟議)하지 않고 마음대로 신역(身役)을 감면하여 준 잘못을 극진히 아뢰고 이어서 엄중히 추고(推考)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어사(御史)에 합당한 사람을 뽑아, 삼남(三南)에서 진휼(賑恤)을 베푼 뒤에 자주 보내어 진정(賑政)의 근만(勤慢)을 살펴서 상벌(賞罰)을 분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어사에 합당한 사람을 비국(備局)에서 뽑아 아뢰게 하고 이담명은 엄중히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목내선이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백성은 모든 부역에 관한 것을 무엇이나 다 피하려고 꾀합니다. 대동 수미(大同收米)에 있어서는 흉년을 만났더라도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수령(守令)인 자가 뜻대로 결단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신(臣)이 삼남(三南)에서 선혜청(宣惠廳)에 신보(申報)한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니, 빌어 준 자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은 자도 있고 마음대로 옮기기도 하고 남에게 주어 이익을 꾀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이 지극히 놀라우므로, 이미 각도로 하여금 그 관리를 사핵(査覈)하게 하였거니와, 그 보장(報狀)이 오면 본디 매우 징계하여야 하겠으나, 진휼(賑恤)을 베푸는 이때에 교체하는 것은 폐단이 있으니, 시임(時任) 수령은 영문(營門)에서 결곤(決棍)하고 이미 갈린 자는 나수(拿囚)하여 결곤하고 색리(色吏)는 영문에 잡아다가 각별히 엄하게 형신(刑訊)하고 곡물은 내년 가을이 되거든 빠짐없이 독촉하여 받아들이라고 해청(該廳)과 각도에 부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참고(4)> 이담명 유배 관련 조선왕조실록의 기사.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3일(경오) 7번째기사

=부호군 이담명·전라 관찰사 이운징을 각각 귀양 파직시키다=

 

정언(正言) 이인병(李寅炳)이 논하기를,

부호군(副護軍) 이담명(李聃命)은 성질이 간사한 사람으로서 하찮은 재주를 가지고, 전후에 사주(使嗾)한 것이 다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이며, 밤낮으로 경영(經營)하는 것이 모두 남을 해치려는 뜻이므로, 세상이 다 흘겨 보고 사람들이 다 한심히 여기니, 멀리 귀양보내소서. 전라 관찰사(全羅觀察使) 이운징(李雲徵)은 백도(白徒)에서 출세하여 이력이 외람되는데, 호얼(湖臬)7980) 에 제수되어서는 물정이 놀라와하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참고]

-이 글을 올린 이후, 최근에 EBS에 올라온 학생의 질문과 교육방송 측의 답변입니다.

 

<질문>

1.45p 사노친곡에서

천지우위인마는 불하유해라 이를 저어하노라 라는 말은 빨리집에 이를수있지만 어떤해가 있지않을까 걱정한다라고 적혀있는데 어떤해가 뭔가요?

<제3수>풀이를 부탁드려요~

 

 

<답변>

제목 : 45, 48쪽작성자 : ***

아름학생,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천지우위인마는 불하유해라 이를 저어하노라

---> 빨리 고향에 이를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이(노모에 대한 그리움, 효성) 허물이 아니나 해가 있을까 두려워합니다. 즉, 현재 처지가 귀양살이 하고 있는 중이니 귀양지를 떠나는 것은 위법이기에 벗어나는 것은 또 다른 죄이기에 벌을 받을 것을 <해>라고 했습니다.

제3수는 <제2수>에 제시된 고향과의 거리감이 마음만 먹으면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가지 않는 것일까요? 종장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종장: 초, 중장에 나타나 잇는 화자의 심정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고향으로 당장 갈 것 같지만 혹시나 화가 있을까 해서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아직까지 화자의 처지가 구체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유배로 인해 고향에 갈 수 없는 안타까움과 노모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난 시입니다.

 

 

 

<문제제기>

위의 답변의 전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답변하는 사람이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즉 답변자처럼 말할 수 있으려면, 시적 화자가 마음을 먹으면 유배지를 벗어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위법이긴 하지만, 귀양지를 떠날 수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 어이없는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배가 장난입니까? 마음을 먹으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참 순진한 해석입니다. 조선시대의 유배라는 처벌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발언입니다. 그래서 작품을 오독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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