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백석, <선우사> 감상과 이해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11. 03:56

 

선우사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고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선우사(膳友辭), 『조광(3권 10호)』, 1937. 10.

*표기는 현대어로 옮기되, 일부 방언의 맛을 살렸습니다.

 

 

오랜만에 백석의 시 한편을 읽습니다. 제가 백석의 여성 편력과 그것이 반영된 시 작품을 묶어 논문을 발표한 것이 1997년이므로 꽤 오래 되었네요. 그때 주목한 백석의 두 여인이 김자야와 박경련입니다. 당시 전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졌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석의 연애시는 모두 전자와 관련되는 것처럼 이야기들 했었죠. 그런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는데 제 논문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논문을 몇 편 보니, 박경련에 대한 이야기가 많군요. 물론 제 논문에 반론을 펴는 경우도 몇 개 보이네요. 어차피 논문이야 반박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긴 하죠.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처럼.

 

 

<선우사>는 위의 출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937년, 그러니까 댄디 스타일의 백석이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 교사로 근무할 때 쓴 작품입니다. ‘함주시초’라는 묶음으로 <북관>, <노루>, <고사(古寺)> 등과 같이 발표된 작품이고, <창원도>, <통영> 등 ‘남행시초’가 발표된 것이 1936년 3월이므로, 근 1년 7개월간의 공백기를 거쳐 묶여 나온 작품입니다.

 

이제는 널리 알려졌지만, ‘남행시초’는 시인이 짝사랑했던 여인 박경련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녀와의 사랑에서 시인은 큰 좌절감을 맛봅니다. 그 이후의 실의(失意)에 빠져 지낼 때 쓴 작품이 ‘함주시초’입니다. ‘함주시초’라 묶이기는 하지만, 이들 작품을 일반적인 의미의 연작으로 보기는 좀 그렇습니다. 개별 작품 하나 하나 떼놓고 감상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제목이 ‘선우사(膳友辭)’입니다. 무슨 한시(漢詩) 제목 같습니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제목을 붙이는 방식이 유사합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사(辭)’라는 한시(漢詩)의 양식을 따른 것은 아니므로, ‘辭’는 그냥 ‘글 또는 말’이나 ‘시’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현재 다음 두 가지 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膳’ 자(字)가 ‘반찬(飯饌)’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반찬 친구인 나와 가재미와 흰밥에 대한 글’이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膳’ 자(字)가 ‘드리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친구에게 주는 글’이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후자에서 말하는 ‘친구’가 결국은 반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재미’가 반찬인 것은 맞지만, ‘흰밥’을 반찬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전자에 따른다 하더라도, ‘음식친구에 대한 글’이라고 풀이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점이 전자의 제목 해석이 갖는 문제점입니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한자어의 구성을 너무 한문 조어법에 치우쳐서 해석했다는 문제점을 갖습니다. 물론 우리말 한자어도 ‘독서(讀書)’처럼 ‘S-V-O’ 구성을 갖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N+N’의 한자어 조어법이 일반적이며, 따라서 이 경우도 ‘음식 친구를 위한 글’ 정도가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음식과 관련된 많은 한자 중에 왜 굳이 ‘膳’ 자(字)를 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膳’ 자(字)에 ‘희생(犧牲)’라는 뜻이 있다는 점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먹을(=밥상에 올려진, 나를 위해 희생할) 음식 친구’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해석이 이 작품의 주제를 감안할 때도 온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백석과 윤동주 시를 비교문학적 견지에서 논한 논문이 있습니다. 상징파의 후기를 장식한 신고전파 프랑스 시인인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과의 문학적 영향 관계를 밝힌 논문입니다. 사계(斯界)에서는 매우 잘 알려진 논문이지요. 그 핵심 논지는 좀 다른 것(-몽상의 시학)이긴 하지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지배적 정서라는 것도 중요하게 지적되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선우사>도 같은 계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는 의인화한 두 벗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가재미이고 하나는 흰밥입니다. 시적 화자의 쓸쓸한 저녁 밥상에 오른 두 벗입니다. 결국 셋이 정다운 마음의 대화(사실 대화는 아니고 일방적인 말하기이죠)를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두 벗은 어떤 점에서 애호(愛好)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이 시에 등장하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잔뼈가 굵었네요. ②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묽닭 소리를 들으며 단 이슬을 먹고 나이가 들었네요. ③ 외딴 산골에서 솔개, 다람쥐 동무를 하고 자랐네요.

 

①은 당연히 가재미를 염두에 둔 시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가재미가 실제로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적 화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②는 당연히 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깨끗한 자연에서 자란 벼, 그리고 그것으로 지은 흰밥이라는 말이 되겠네요. ③은 시적 화자 자신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을 보내며 자랐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셋의 공통점입니다. 색채 이미지로 보면 ‘희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좋은 말로 욕심이 없다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말하면 힘이 없는 나약(懦弱)한 존재라고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라기보다, 시적 화자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라고 말하는 것일 터이고요.

 

시적 화자는 세상이 참으로 거칠고 험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셋은 ‘억세거나 거세지’ 못합니다. 착하디 착합니다. 그러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처지가 그렇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죠. 착하게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기력하게 산다는 의미도 되어버리는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했겠죠. 이 점에서 저는 이 시 역시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지배적 정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그로 인해 체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 응전의 자세를 취합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 그 구체적인 시적 포즈입니다. 그 결과 세상에 대해 다소 폄하하는 어투로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같은건”이라고.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대한 기왕의 해설에 조금 이의를 갖게 됩니다.

 

 

대개의 시 해설서나 현대어 옮김에서 마지막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깁니다.

 

 

원시 : “힌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이 같이 있으면/세상같은건 밖에나도 좋을 것 같다”

 

 

현대어 본 :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이 같이 있으면/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즉 “밖에나도”를 “밖에 나도”로 옮깁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숭원 교수님은 “가난하고 약한 존재이지만 이 어진 벗들이 함께 있다면 세상의 이해관계 같은 것은 저 바깥으로 밀어 놓아도 좋을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이숭원, <백석을 만나다>, 태학사) 시의 흐름을 볼 때 큰 무리가 따르는 해석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눈 밖에 나다”라는 관용 표현이 있습니다. “신임을 잃고 미움을 받게 되다.”라는 뜻이지요. 혹시 이런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도 괜찮다, 이런 정도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마지막 구절은 좀 시니컬한 어조입니다. ‘세상같은건’이라는 표현은 사실 좀 시니컬한 어조로 말할 때 나오는 어사(語辭)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 역시 좀 시니컬하게 읽어주는 것이 어떨까 해서 그렇습니다. ‘눈 밖에 나다’처럼 좀 시니컬한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남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를 감싸 안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두 해석이 있습니다.

 

 

“하얗고 억세지 않고 정갈한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각각 바다와 들판과 산골의 아름다운 대상을 대표하며 ‘완벽한 우주적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가난해도 서럽지 않고 외롭지도 않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재미와 벼와 나를 가리키는 이 ‘우리들’은 세상을 반목과 질시가 아닌 하나의 원융(圓融)한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 바탕에 동질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은유적 세계관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 말은 세상을 버린다는 외톨이 의식이라기보다는 외로운 세 존재가 쓸쓸한 어느 저녁나절 어느 한순간에 완벽한 한 쌍을 이룰 때 이들은 그 자체로 우주의 한 축이자, 이 세상의 대표적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즉, 더 이상 다른 존재를 논할 필요가 없이 이 순간 세 층을 이루는 ‘우리들’ 셋은 완벽한 세상의 대표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인간들이 얽혀서 싸우고 경쟁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세상만 세상이 아니라, 어느날 저녁 쓸쓸한 나조반 위에서 우연히 함께 만난 다른 생명체들과의 세상도 아름답고 독특한 시적 세계를 이룩할 수 있다는 다원주의적 세계관이 뒷받침된 미학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생태주의적 관점의 해석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저로서는 좀 과(過)한 해석이 아닌가 합니다.

 

 

다음과 같은 해석도 있습니다.

 

 

“요컨대 힘이 없어서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닌 순수성의 지향에 의해 세상을 능동적으로 거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약자의 탄식에서 벗어나 약자의 순수성으로 타락한 세상보다 우위에 서려는 시인의 자존적 의지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런 용어의 성립 여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입니다만, 정신주의적 관점의 해석이 아닌가 합니다. 위의 경우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시인의 작품 전반이 아닌 이 작품에 국한하여 말할 경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금 너무 나간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가 실연(失戀)한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최영미의 <혼자라는 건>이라는 시를 떠올렸습니다.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혼자라는 건/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로 시작하는 시 말입니다. 즉, 시인이 혼자 쓸쓸히 밥을 먹고 있다는 상황에 무게 중심을 둬 보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라는 구절이 이 시의 중핵(中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쓸쓸한 저녁 밥상에서의 상념이 이 시의 주제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본 유학을 다녀 온 모던보이, 국경 근처의 조그만 도시에서 외롭게 교직 생활을 하는 청년, 고향에 아내가 있지만 다른 새 여자에게 구애를 하다가 버림을 받은 마음 여린 청년, 그 쓸쓸한 저녁 식사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마치 밥상에 오른 먹을거리처럼 처량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도 자존심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했겠지요. 자신이 버림받은 것은 자신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저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습니다.

보통 우리가 시를 분류할 때 동원되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주지시(主知詩), 주정시(主情市), 주의시(主意詩), 경물시(景物詩) 등. 그런데 저의 경우는 이 시를 주정시로 봅니다. 태도나 의지보다는 정적(情的)인 면을 중시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시를 쓸쓸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상념, 그 쓸쓸함을 노래한 시로 보는 것입니다. 다만 시인의 정서가 직정적으로 드러난 시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백석에게 많은 영향을 준 외국작가는 제가 보기에 토마스 하디와 두보입니다. 실제로 백석은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처럼 삶의 비애를 노래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그 정서를 드러내지 않는 시풍은 두보의 시와 더 관계가 깊다고 봅니다. 실제로 이 시를 쓸 때 백석은 두보의 시에 푹 빠져 있었기도 합니다.

 

*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수능특강 인터넷 수능 운문문학에 이 작품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수능 특강 언어영역에 대한 분석 중이라, 인터넷 수능은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강의도 아직 충분히 올라오지 않았고요. 그런데 몇 개만 본 것이지만, 괄목상대할 만하네요. 작년 인터넷 수능이 한 마디로 저질이었는데, 올해는 전혀 다르네요. 수능특강의 경우 문제의 성립 여부는 차치하고, 아예 문장 자체가 안 되는 것이 허다했습니다. 집필자들의 필력이 워낙 떨어져서 보기 민망한 문장이 발에 치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인터넷 수능 시리즈는 다릅니다. 관점의 차이 문제는 있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죠. 우선 문장이 깔끔합니다. 기대가 됩니다. 나중에 좀 더 자세한 분석 글 올리겠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인터넷 수능 시리즈의 경우 교재보다는 강의 중심으로 분석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수능 특강의 경우 두 강사가 강의를 하는데, 그 중 한 사람도 눈에 뻔히 보이는 오류를 바로 잡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한 구석에서나마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괴함을 금할 수가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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