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 그리고 우리는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30. 02:06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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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 퀸, 한국의 마돈나. 대중은 가수 김완선을 그렇게 기억한다. 화려한 춤과 여전한 미모 때문에 생긴 찬사다. 지금도 많은 신인 가수들이 ‘제2의 김완선’을 꿈꾼다. 이것은 대중 예술인으로서 큰 행복이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기 때문이다.

 

호의적인 평가의 맞은편을 생각해 보면, 잃은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호소력 짙은 가창력이나 시대정신을 반영한 예술 철학 정도가 아니겠는가? 물론 가창력 면에서 그녀의 음악을 인정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철학에 대해서는 선뜻 수긍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말이다. 아니 거죽만 화려할 뿐, 철학이 결여된 노래라고 폄하하는 사람마저 있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녀의 노래에는 그녀 나름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다만 유달리 화려한 무대 매너가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노래를 가볍다고 비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비극 배우에 견주어 희극 배우가 가볍다고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우매한 일이다. 잣대가 필요할 때, 저울을 들이미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는 그녀의 노래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주가 화려하거나 춤이 요란한 것도 아니다. 간결한 악기 구성이고, 리듬도 절제되어 있다. 오히려 메시지가 도드라지는 노래이다. 김완선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는 전혀 다르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가볍되 진지하고, 진지하되 심각하지 않다.

 

 

 

 

 

 

빨간 모자를 눌러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항상 밝게 웃는 삐에로, 아니 늘 밝게 웃어야 하는 삐에로. 그 웃음 뒤의 남모를 비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상이 아닌가? 현대 사회라는 무대는 현대인에게 삐에로와 같은 서글픈 삶을 강요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현대인이 느끼는 운명애(amor fati)를 가수 김완선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F W 니체(1844∼1900)가 말하지 않았던가?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삐에로를 보고 웃어도,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차라리 슬픔을 아는 삐에로가 좋다고 노래할 때, 가수 김완선은 무얼 생각했을까? 화려한 의상, 현란한 춤, 그 뒤에 깔린 슬픔을 너희가 아느냐고, 그렇게 되뇌지 않았을까?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라고 되뇌지 않았을까?

 

이제 인생을 알 만큼 알 불혹(不惑)의 나이의 김완선. 그녀에게 좀더 성숙한 노래를 기대해 보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닌 이유이다. 드러내 보이기 위해 어설프게 꾸며진 진지함이 아닌, 자신의 내면 저 깊은 심연을 응시하는 속 깊은 노래를 기대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나는 그녀라면 기대에 부응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2의 그녀를 꿈꾸는 많은 후배를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