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

김건모, <서랍속의 추억>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5. 3. 01:13

 

8567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은 이미지의 현상학을 멋지게 펼쳐 보여주는 저서이다. 이 책에서 다뤄지는 이미지는 집, 상자, 장롱, 새집, 조개껍질, 구석 같은 것들인데, 그것은 모두 궁극적으로 요나 콤플렉스에 관련된다. 인간은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 놓여 있을 때 안온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나 콤플렉스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감싸여 있었던 원초적인 경험이 무의식 속에 그런 이미지를 뇌에 각인시킨 것이다. 유년 시절 장롱 속에 숨어본 경험이나, 테이블 구석에 웅크린 자세로 숨어들었을 때의 평화로웠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김건모의 ‘서랍 속의 추억’은 궁극적으로 요나 콤플렉스로 수렴되는 상상력을 보여주는 노래이다. 서랍은 집, 구석 등과 마찬가지로 내밀성으로 인하여 가치를 갖는 대표적인 공간인 것이다. 인간은 대개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자신만의 공간을 갖기를 원한다.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에 대한 욕구가 구체화하는 시기인 것이다. 자신만의 방, 자신만의 서랍을 갖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내밀한 공간을 채웠던 사물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피곤한 삶에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김건모의 ‘서랍 속의 추억’에서 내밀함의 가치로 빛을 발하는 사물들은 무엇인가? 일기장, 연인의 사진과 편지, 그리고 선물이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일기장에서 내밀함의 가치를 뺀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아니 타인에게 쉽게 공개되어버리는 일기를 어찌 일기라고나 할 수 있겠는가? 연인의 사진과 편지도 마찬가지이며, 마음이 깃든 선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들로 가득한 서랍은 생각만 해도 내밀한 행복감과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사물이 거울이다. 김건모의 서랍 속에는 ‘너를 위해 비춰보던 거울’이 들어 있다. 거울에 빗대어 사춘기를 이렇게 정의할 수 없을까?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얼굴이 비추기 시작하는 때라고. 나의 얼굴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는 것은 뒤집으면, 타인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 때 타인은 연인으로 변모하는 것인데, 사춘기는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 눈을 뜨는 시기이기도 하고, 사랑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사는 또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서랍 속의 사물들이 빛을 잃을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의 소중함 또는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니 말이다. 거울 속에 ‘네’가 없고 초라한 내 모습만 혼자 울고 있을 때에 이르러서야, ‘너’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니 말이다. 자신의 수첩에 적혀 있던 ‘너’의 이름을 까맣게 지우고, 나의 마음속에 새겨둘 즈음에 이르러서야 그 이름이 갖는 소중함을 알게 되니 말이다. 김건모에게만 그렇겠는가? 누구에게나 진정한 사랑의 추억은 지우개로 깨끗이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까맣게 지워’ 덮어 둘 수는 있어도 말이다. 날을 잡아 서랍을 깨끗이 비울 수야 있지만, 서랍이 추억의 상자인 까닭에, 마음속에서마저 비울 수는 없는 것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따뜻한 빛, 그것의 근원은 서랍이나 그 속의 사물들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의 눈빛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하희정|문학평론가〉-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나는 가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종률, <임을 위한 행진곡>  (0) 2007.05.03
김완선,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0) 2007.05.03
김민기, <늙은 군인의 노래>  (0) 2007.04.27
이용, <사랑의 상처>  (0) 2007.04.26
하덕규, <가시나무>  (0) 2007.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