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시조 세 편

국어의 시작과 끝 2012. 5. 2. 00:10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 초기 왕권과 문물제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명신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와 <문종실록>에 실린 황희의 졸기에 의하면, 호는 방촌(尨村)이고 본관은 장수이다. 고려말에 벼슬에 나가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태조가 개국한 후에 세자 우정자가 되고 태종 때에는 이조정랑이 되었다. 태종의 신임을 받아 민무구, 민무질 등을 제거하였고, 47살에 참지의정부사와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의정부사와 대사헌을 거쳐 다음해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병으로 위급해 지니 태종이 어의를 명해 치료하고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게 하였다. 이후 세자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평안도 도순문사로 나갔고, 다시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나 세자의 폐위와 함께 서인이 되어 교하로 폄출되었다가 남원으로 옮겨졌다. 세종 즉위 후 의정부 참찬이 되고 강원도의 기근을 구휼한 공으로 판우군 도총제부사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찬성과 대사헌을 겸했다. 그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87살(세종31년)에 치사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서 세종의 치세를 도왔다. 그는 생김새가 크고 총명하였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무거우며 기쁨과 슬픔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고, 일을 처리함이 정대하고 대체를 보존하여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활은 검소하였고 예법은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다. 성품이 너무 관대하여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고,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란다는 비난이 있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그의 시조로 사시가(四時歌) 4수가 전한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이는 밭을 가니

 뒤 뫼에 엄긴 약을 언제 캐려 하느니.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중(細雨中)에 호미 메고

 산전(山田)을 흩매다가 녹음(綠陰)에 누웠으니

 목동(牧童)이 우양(牛羊)을 몰아다가 잠든 나를 깨와다.


 모두 4수의 시조를 두 수씩 묶어서 살펴보자. 첫 수는 봄이 되어 일을 재촉하는 내용이고, 둘째 수도 여름에 쉬지만 말고 김을 매라는 내용이다. 작중화자인 농부가 봄여름에 바삐 농사짓는 생활을 읊은 것이다. 첫 수의 초장에서 봄이 되면 농촌에 할 일이 많다고 했고, 중장에서 그물도 손질하고 밭도 갈아야 하는 바쁜 형편을 말했으며, 종장에서 그나마 뒷산의 약초 깨기는 손이 모자라서 걱정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봄이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민의 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둘째 수의 초장은 여름날 비 내릴 때에도 김을 매어야 하는 나날을 말했고, 중장에는 가난한 농민이 비탈 밭을 매다가 잠깐 그늘에서 쉬는 것을 그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여유도 아깝기 때문에 목동이 소와 염소를 모는 소리에 깨어나서 다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봄여름의 바쁜 농촌 풍경을 표현하였다. 시인은 왜 이렇게 농민의 빠쁜 일상을 부각시키고 있는가. 그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을 권장하는 뜻에서다. 세종 때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농법을 개량한 만큼, 농본정책으로 왕조의 기초를 확립하려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인 그가 이렇게 농민을 독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조(大棗)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들으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뫼에는 새 다 긏고 들에는 갈 이 없다.

 외로운 배에 삿갓 쓴 저 늙은이

 낚대에 맛이 깊도다 눈 깊은 줄 아는가.


 가을과 겨울을 읊은 두 수는 봄여름을 읊은 두 수와는 달리 여유롭고 한가하다. 원래 농촌이 봄여름에 바쁘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풍요롭고 한가해지기 때문이다. 첫 수의 초장은 대추가 붉게 익고 밤알이 떨어지는 풍요로운 풍경이고, 중장도 벼를 수확한 논바닥에 여름내 살찐 게를 제시하여 가을의 넉넉한 농촌을 묘사했다. 그러니 종장에서 술을 걸러 마시고 봄여름에 농사짓느라 힘들었던 노고를 취흥으로 달래본다는 것이다. 둘째 수의 초장에는 차가운 겨울이 와서 인적도 그치고 새들도 날지 않는다고 하고, 중장에서 오직 외로운 어옹(漁翁)만이 물위에 배를 띄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종장에서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낚시하는 전원생활의 깊은 맛을 즐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유종원의 ‘강설(江雪)’ “천산의 새는 그치고 온갖 길에 사람 자취 없다. 외로운 배에 삿갓 쓴 늙은이는 눈 내리는 강 위에서 홀로 낚시질 하네.”(千山鳥飛絶 萬徑人蹤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라는 시와 아주 비슷해서 그것을 번안한 것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살펴본 ‘사시가(四時歌)’ 4수는 농경시대에 봄이 되면 싹이 터 자라나고 여름이면 성장하여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 맺어 수확하고 겨울에는 갈무리해 두고 한가로움을 즐기는 사철의 순환하는 이치에 맞추어 시를 펼쳐놓은 것이다. 비록 번안한 것이 있긴 하지만 농본 국가의 기본 원리를 시조로 펼친 시인의 도량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  


 하위지(河緯地, 1387-1456)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세종, 세조실록>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 의하면, 세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 교리를 지냈고 <오례의주(五禮儀註)>를 상정하는 데 참여했다. 문종 때에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물러갔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받은 녹봉은 먹지 않고 저장해 두었다.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과묵하였으며 공손하고 예에 밝았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객산문경(客散門扃)하고 풍미월락(風微月落)할 제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시구(詩句)를 흩부르니

 아마도 산인득의(山人得意)는 이뿐인가 하노라.


 이 시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시절에 지은 작품인 듯하다. 문을 닫아걸고 홀로 술과 시를 즐기는 야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에는 손님이 돌아가자 문을 닫아걸고 바람은 고요한데 달빛은 비친다고 하여 은둔하는 선비의 그윽하고 조용한 환경을 제시하였다. 비록 한시구에 토를 단 느낌이지만 한시 절구의 간결하지만 그윽한 여운이 시조에 스며들고 있기도 하다. 중장은 시인의 행동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술독을 열고 취흥에 젖어 시를 읊조리는 야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어린 단종을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보살피듯 하겠다던 수양대군이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대신들을 죽이자, 그 무도함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한 것이다. 종장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현실을 떠난 산인(山人)의 득의로운 경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야인으로 살지 못했고 다시 벼슬길에 불려나왔으며, 단종 복위를 위해 젊은 선비들과 뜻을 같이했다가 발각되어 죽게 되었다. 이 작품은 정치적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에 잠깐 고요하게 살려했던 시인의 심정이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최덕지(崔德之, 1384-1455)는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이다. <국조인물고>와 <연려실기술>에 보면, 호는 연촌우수(烟村迂叟)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을 거쳐 삼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했다. 함양, 김제 등의 군수를 지내고 남원부사가 되었다가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으로 물러나 당호(堂號)를 존양(存養)이라 하고 학문을 연구했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관 직제학을 삼았으나 이듬해 늙었다며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비들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기미를 알고 몸을 보전하였다며 그의 지혜와 학문과 절개를 칭송했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청산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로 낚싯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이 시는 아마 남원부사를 그만두고 영암으로 물러가 존양(存養)이라 당호를 짓고 전원에서 생활하던 때에 지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본성을 보존하고 기른다는 당호를 내걸고 학문과 전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았을 때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현실을 잊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초장에는 청산에서 사슴과 벗하는 자연 속의 생활을 말했고, 중장에는 자연에 묻혀서 사는 생활이 생명에 이로운 약초의 맛과 같아서 세속적 현실의 즐거움은 끊어버렸다고 했다. 종장에는 전원에서 고기잡이하는 흥취가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는 이렇게 전원에 사는 즐거움을 알았기에 문종이 불러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나 왕은 병약하고 세자는 어렸으며, 여러 대군은 강건하여 정국이 소용돌이칠 것을 예견하고 68살의 나이를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의 피비린내나는 왕위찬탈에 연루되지 않고 몸과 이름을 보전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강호(江湖)의 생활이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지혜와 관련됨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고전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운몽 전편과 해설  (0) 2012.06.13
김성원의 시조에 대한 오해  (0) 2012.06.09
권필의 편지 두 통  (0) 2011.10.30
필독 사설 시조 25편 해설 및 감상  (0) 2011.04.26
정철 <관동별곡> 전문 상세 해설  (0) 2011.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