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국어어휘력

훈민정음 창제에 대하여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10. 24. 00:45

 

세종은 한 번도 한글이 한자를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글 창제 후 한글은 공식문자로서 여러 용도로 쓰였지만 한자의 지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종은 한자의 역할과 한글의 역할을 달리 보았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의 위대함은 역할이 다른 문자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한 데서, 그리고 직접 문자 창제 사업을 추진해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열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사실, 세종 당시에도 한글(언문)의 창제와 사용은 한자와 한문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세종 또한 한 번도 한자와 한문의 권위를 부정한 적이 없었다. 세종은 문란하게 쓰이는 조선 한자음을 통일해야 한다는 점, 한자음을 표기하고 우리말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 이를 위해서는 음소 문자가 가장 적합하다는 점 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아래 한글을 창제했다.

그럼 당시에 한글이 담당했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교육의 중추였던 한문 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교육 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천자문>하나만 보더라도 한자의 아래에 뜻과 소리를 한글로 기록하여 한자 학습을 수월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와 같은 분류어휘집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교육 문자로 한글을 사용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언해(번역)된 한문 경전은 표준적인 해석을 통해 한문 학습을 할 수 있는 참고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글은 한문 교육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어 교육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발음 사전이라 할 수 있는 <사성통해>와 같은 운서에서는 한글로 중국어 발음을 표시했고, 학습자들은 이를 통해 정확한 중국어 발음 익혔다. 중국에서 나온 운서는 한자로 한자의 발음을 표기했기 때문에 조선 사람이 운서를 통해 정확한 중국어 발음을 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사대를 중요시하는 당시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교육받은 역관(譯官)이 정확한 중국어 발음을 못해 중국 사신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은 정확한 중국어 발음표기에 활용된 것이다.

또한 한글은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는 효와 충이 사회 질서의 근본이념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사상을 백성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바로 교화였다. 15세기 중세 사회가 왕을 중심으로 한 전제 군주 사회였고 유교 이념을 새로운 사회 질서로 내세우고 있던 시기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교화는 백성들을 유교 이념 체제에 순응케 하는 중요한 일이었던 셈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한글은 교화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한글의 역할은 한글이 사회 계층 간의 의사소통을 도왔다는 데 있다. 한글로 상소를 올리거나 한글로 방을 붙임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언로(言路)가 트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반들은 하층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글이 필요했고,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한글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사대부 남성과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던 여성들 간의 소통에도 한글은 중요한 기능을 했다. 중전이나 대비가 신하에게 한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신하들이 중전이나 대비에게 한글로 문서를 올리는 것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일반적인 일이었다. 한글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할 때는 한글이 한문보다 사용 층이 더 두터웠던 문자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