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순화와 국어기본법 그리고 국어책임관
1. 국어 순화의 의의
순화(醇化)란 불순한 것을 걸러서 순수하게 하는 일이요, 얽혀 있는 것을 갈피를 잡아 정리하는 일이다. 따라서 국어 순화란 국어에 뒤섞여 있는 낯선 한자어와 일본식 한자어 그리고 서구 외래어를 걸러서 우리말답게 바로잡은 일이다. 또 국어 순화는 비속(卑俗)한 말을 품격 있고 고운 말로 다듬는 일이요, 옳지 않는 생각이 배어있는 말을 바람직한 말로 다듬는 일이다. 요컨대, 우리말을 곱게 다듬고 올바르게 바로잡는 일이 국어 순화이다.
(1) 말의 역기능(逆機能)을 막음
말이 생기고 변하고 사라지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긴 하지만,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말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바꾸고, 없애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을 좀 더 곱고 올바른 말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말을 단순히 ‘되어진 것’으로만 여길 수 없으며, ‘무엇을 이루어 내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훔볼트의 말마따나 언어는 ‘에르곤(ergon)’이 아니라, ‘에네르게이아(energeia)’이다. 말에는 인간을 바꾸는 힘이 있는 것이다.
환경에 따라 사람이 바뀌고 교육에 따라 사람이 바뀌듯이, 말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런데 환경이 그러하듯 말은 인간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고운 말은 사람을 착하게 만들고, 거친 말은 사람을 험하게 만든다. 또 교양 있는 말은 사람을 품격 있게 만들고, 비속(卑俗)한 말은 사람을 천박(淺薄)하게 만든다. 뒤엣것들을 말의 역기능(逆機能)이라고 한다면, 국어 순화는 그러한 말의 반작용을 막기 위한 사회적 노력의 일환이다. 예컨대 인종 차별적인 말은 편견이 없는 말로 바꾸고, 성차별적인 말은 양성(兩性)을 모두 존중하는 말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국어 순화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를 바람직하게 만드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이것이 국어 순화의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2)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
말은 세상을 보는 창(窓) 역할을 한다. 햇살이 맑아도 창이 흐리면, 세상은 흐리게 보일 수밖에 없다. 세계는 존재하는 방식대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는 방식대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국어 역시 우리 민족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창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국어에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우리 민족 나름의 세계상이 들어 있다. 국어는 우리 민족의 세계상을 담는 그릇이요, 민족정신의 언어적 상징인 것이다. 국어는 ‘겨레의 얼’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국어를 의식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은 곧 민족과 민족 문화 나아가 민족의 역사를 성찰하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민족의 흥망(興亡)과 국어의 흥망이 기복(起伏)을 같이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민족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가장 강력한 끈이 국어임을 알게 된다. 소쉬르도 이와 같은 사실을 밝혀, “말의 공통성이 곧 같은 혈족(血族)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말은 공통적인 민족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민족 통일을 이루는 데에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국어는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적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제 되는 것이 외래어이다. 이 들어온 말은 우리 민족의 세계 인식과 생활양식이 투영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에서 솎아내야 할 말의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잡초와 외래어는 다르다. 밭의 잡초는 뽑아서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말의 잡초는 뽑아 낸 빈자리에 반드시 다른 말을 갈아 심어야 한다. 갈아 심는 말, 이것은 이미 쓰고 있는 말이거나, 혹은 옛말에서 찾아 낸 것이거나, 아니면 천부의 창의성으로 새로이 만든 말이어야 한다. 새말의 만듦, 이것은 우리 민족의 세계상을 담은 그릇인 말을 순화하는 데에 피할 수 없는 창조 작업이다.
(3) ‘체’와 ‘자[尺]’으로서의 기능 회복
말의 순화에서는, 먼저 말의 불순물이 어느 것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이를 바로잡고 다듬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외국어가 국어에 들어올 때나 이미 들어와 혼돈을 이루고 있을 때, 국어는 이들을 거르는 ‘체’ 역할을 해야 하고, 또 국어는 이들의 가치를 재는 ‘자[尺’]의 역할을 해야 한다. 체가 성글어서는 곱게 거를 수 없고, 자가 부실해서는 올바르게 잴 수가 없다. 먼저 국어를 올바르게 다듬는 일이 국어 순화에 먼저 필요한 이유이다.
한 번의 체질과 잣대질로 국어 순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 국어 순화의 결과를 모두가 수용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계속적으로 외국어가 유입되고 있다. 그래서 국어 순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은 좀 더 잦은 체질과 잣대질이 필요하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와 사회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입법․ 행정․사법기관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殘滓)라고밖에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구태(舊態)에 젖은 말과 문장을 사용하면서, 국민에게만 국어 순화를 권유해서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4) <국어기본법>과 국어책임관
2005년 1월 공포되어 7월부터 시행되었고, 2009년 일부 개정된 <국어기본법>은 국화순화를 위한 정책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국어의 사용을 촉진하고, 국어의 발전과 보전의 기반을 마련해, 국민의 창조적 사고력의 증진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하고 민족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제정한 법이다. 이 법의 시행과 동시에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은 폐지되었다.
<국어기본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5년마다 ‘국어발전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하고, 2년마다 국어의 발전과 보전에 관한 시책 및 그 시행 결과에 관한 보고서를 해당 연도 정기국회 개시 전까지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국어정책 수립에 필요한 국민의 국어능력·국어의식·국어사용환경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실태조사를 할 수 있다. 또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장은 소속 공무원 가운데 국어의 발전 및 보전을 위한 업무를 총괄하는 국어책임관을 지정할 수 있다.
이처럼 국어책임관은 국어기본법에 따라 정책이나 사업이 명확하고 올바른 공공언어로 표현되도록 하기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국어책임관의 역할에 대한 법적규정인 부처별 시행규칙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국어책임관제는 사문화(死文化)된 법 규정으로 전락해 부작용만 동반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어책임관 제도의 정립을 위해서는, 현재처럼 홍보담당관이 겸임하는 것이 아니라 총무부서나 정책부서에서 맡도록 하고, 시행규칙에 국어책임관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해야 할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국어 전문가를 기관별로 한 명씩 채용해 실제 사용하는 공공언어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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