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27. 01:04

 

詩中畵畵中詩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전 하남호 선생님(일가 할아버지)께서 친히 보내주신 서예 작품입니다.

감사의 뜻이라고 해야 하나요. 제가 집필한 국어생활 교과서(블랙박스)에 수록되었습니다. 

 

옛날에 절묘하다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이 있었다. 장송(長松) 아래 한 사람이 고개를 들어 소나무를 보는 모습을 그렸는데 신채(神彩)가 마치 살아있는 듯하여, 천하의 명화로 일컬어졌다. 처사 안견(安堅)이 말하기를, “이 그림이 비록 묘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고개를 올려보면 목 뒤에 반드시 주름이 잡히는 법인데, 이것은 없으니 그 뜻을 크게 잃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버린 물건이 되었다.

 

또 옛날 그림으로 묘필이라 일컫는 것이 있었다. 늙은이가 손자를 안고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는 모습을 그렸는데, 신채가 살아 있는 듯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이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그림이 비록 좋긴 하다만, 무릇 사람이란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반드시 그 입이 절로 벌어지는 법인데, 이는 다물고 있으니 크게 실격이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버린 그림이 되었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두 그림 모두 기교로 보아서는 이미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다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목 뒤의 주름과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 대한 관찰을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화가가 놓친 것은 낙락한 소나무의 기상을 우러르는 선비의 마음과, 손자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고 보니, 그것은 결코 사소한 실수라 할 수 없다. 호리(豪釐)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위 예화는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 속에 예리한 관찰과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유몽인은 이 예화를 소개한 뒤, “무릇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번 본의(本意)를 벗어나면, 비록 금장수구(錦章繡句)라 하더라도 식자는 취하지 않는다. 오직 안목(眼目)을 갖춘 자만이 능히 이를 알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예술을 감상하는 일은 바로 이 호리의 차이를 변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몽계필담>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구양수(歐陽修)가 한 떨기 모란꽃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얻었다. 잘된 그림인지 어떤지를 알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그림을 가만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꽃이 활짝 피고 색이 말라 있는 걸 보니 이것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의 모란이다. 고양이 눈의 검은 눈동자가 실낱같이 가느니 이 또한 정오의 고양이 눈이다.” 예술의 진가는 이렇게 알아보는 안목 앞에서만 빛나는 법이다.

 

화가가 형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거나, 시인이 대상을 방불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일이다. 그래서 송나라 진욱(陳郁)은 <설부(設郛)>에서 “대개 그 형상을 그리는 데는 반드시 그 정신을 전해야하고, 그 정신을 전하는 데는 반드시 그 마음을 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자와 소인이 모습은 같지만 마음은 다른데, 귀하고 천하며 충성스럽고 사악한 것이 어찌 스스로 구별되겠으며, 형상이 비록 닮았다 하더라도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을 그리기가 오직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인이 정을 머금어 이를 펴고, 경물을 대하여 마음을 움직이며, 물상을 그려냄에 그 정신을 얻게 된다면, 저절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향기 없이 표현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성정의 천진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말아 어떠한 생동감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 호리(豪釐)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나. 글을 쓸 때나, 강의를 할 때나, 업무를 볼 때나, 꼭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말이 아닌가 합니다.

 

[참고] 장전 하남호

 

호는 장전()이며, 1926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났다. 한국 서예계의 거목인 소전() 손재형()에게 배웠으며, 예서와 행서에 특히 뛰어났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서예 부문에서 13, 15, 16, 17회 입선하였고, 18~21회  특선을 하였다. 1978년 국전 초대작가를 거쳐 1983년 남도예술고등학교 교장이 되었고, 국전 서예 부문 심사위원,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운영위원, 한국서가협회 공동회장 등을 지냈다. 1992년에는 고향인 전남 진도에 남진미술관()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한편 70대 후반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전남 해남에 있는 땅끝탑비에 새겨진 글씨도 그의 작품이다. 문화예술 발전에 힘쓴 공로로 보관문화훈장과 세계평화예술상을 받았다. 2007년 10월 4일 사망하였는데, 발인 날에 서양화가인 둘째아들 영술도 신장염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출처] 하남호 [河南鎬 ] | 네이버 백과사전

 

제가 기억하고 있는 작품은 보해소주의 병에 있는 '보해(寶海)'라는 글씨인데, 장전 할아버지의 작품이라 하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