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
생명사상을 논의하는데 과연 춤이 적합한 것으로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은 사람이 왜 춤을 추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답변할 수 있는 내용 속에 이미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것은 춤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춤을 출 수 있는가. 살아 있기에 춤을 춥니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제대로’ 살아 있도록 하는 생명의 자기 충일의 욕구 때문에 춤추는 것입니다. 춤만큼 살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시켜 주는 장르가 있는지, 다른 문화가 있는지 여러분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춤은 사람만이 추는 것이 아니지요. 흔히 파도가 ‘춤춘다’라는 말을 합니다. 파도가 ‘물결친다’는 말과 파도가 ‘춤춘다’는 말은 그사이에 ‘움직인다’라는 공통성이 있지만 그러나 질적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결친다’라는 표현으로서는 미흡한, 그 어떤 기운에 휩싸여 있을때 우리는 ‘춤춘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사물이나 현상을 마치 인간의 것인 양 빗대어 의인화한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이 사물이나 현상에 움직여 나타난 표현인데요.
그러나 그것은 주객분리에 따른 일방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물이나 현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대상 자체의 자기생성 활동과 인식주체의 생성활동을 일치시켜 동시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여기서는 그 지점, 물결친다와 춤춘다 사이를 가르고 또 이동시키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본다면 새가 ‘지저귄다’와 새가 ‘노래한다’는 말도 그러합니다. 노래하는 것도 실상은 지저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지저귐’과 ‘노래함’은 그 질적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춤추고 노래하는 원천동기인 ‘살아 있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인간학적 철학이라든가 생태학적 철학의 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쿠르트 작스(Curt Sachs)가 지은 “세계 춤의 역사”의 서문을 보면 춤춘다는 것은 “보다 한 단계 고양된 삶일 뿐”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삶은 삶인데 그저 밋밋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고양된(higher level)삶이라는 거지요. 바로 그것은 하나의 개체적 삶이 ‘제대로’, ‘저 나름대로’, 더 나아가서 ‘제 멋대로’ 사는 삶이란 뜻이어서 존재의 자기 정위(正位)입니다. 삶이 본래의 제자리를 잡는 것이 바로 춤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춤은 존재의 자기향유이고, 자기창출이기도 합니다.
또한 쿠르트 작스는 그의 책 서문의 첫머리에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을 알리요”라는 옛 잠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춤추는 사람이어야만, 춤을 추어야만 인생의 맛과 멋, 그리고 의미와 깊이를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춤은 그만큼 삶의 끝없는 도정이고 또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기에 춤춘다”라는 말에서 ‘살아 있음’ 이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요. 살아있음은 일차적으로 개체를 보존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존재의 일차 규정으로서 ‘생존’을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먹고 살고 자손을 퍼뜨리는 자연본능이자 최소한의 인간조건인 이 생존을 위해 인간은 춤추어 왔습니다. 그 다음 ‘살아있음’은 존재의 활동규정, 존재의 활성화, 활력, 활기인 ‘생활’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연 본능적 존재를 넘어서 진, 선, 미, 성의 가치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역사와 문화의 질을 얻게 됩니다. 이를 위해 인간은 또 춤추어 왔습니다. 마지막 ‘살아있음’은 ‘생명’입니다.
생존과 생활을 가능케 해 주는 에너지원으로서, 생명은 삼라만상 모두가 세계사적 존재로서 공생하고 협동하는 유기적 생체에너지의 전일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매 단계마다 춤은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춤이라는 것이 삶과 직결되어 있으면서 단순한 생존적 차원만이 아니라 삶의 길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단계로의 무한한 도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삶이 궁극에 도달하고자 했을 때에야 거기서 비로소 열리는 무극대도의 시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춤은 활동의 ‘무’이고 움직이는 ‘도’인 것이지요. 처음과 마지막이 끝내 물고 물리며 돌아가는 무궁의 시간 속에서 춤은 보이지 않는 질서의 현현이고, 그러므로 본래 영성적인 것입니다. 그처럼 춤은 원초 생명의 자기확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자기확인이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 개체적인 존재자일 뿐 아니라 다른 무엇과 유기적인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자이고, 돌덩이 하나에도 그 자체에 영성적인 마음이 있어 유동하는 한 생명체로서 인간과 서로 교류하면서 우주진화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가이거 가설’이나 네오 휴머니즘, 또는 기이론을 중심으로 한, 신령함의 자기생성활동으로 밖에는 달리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춤이야말로 궁극적인 생명가치를 확인해 주고 실현해 내는 하나의 핵심적인 매개체가 되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춤추는 것만큼 거룩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싶기도 하지요. 그런데 dance의 어원을 이루고 있는 ‘tanha’의 뜻이 또한 그러하다고 합니다. 원래 dance는 뛰는 춤, 도약의 춤, 환희의 춤만을 지칭했는데 어느새 춤 일반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산크리트어 ‘tanha’의 원래 뜻은 생명력의 충일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tanha의 어원 자체가 춤과 생명의 관계를 잘 예시해 주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춤은 생명력이 흘러 넘치는 살아 생동하는 것이어서 언제나 죽음이나 죽임의 상황에 대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만큼 적극적이고 쟁투적인 삶입니다. 춤은 온갖 반 생명에 대해 저항에 왔습니다. 우리는 춤출 수 없도록 사회 체제를 몰고 간 중세시기에 춤추지 않으면 살수 없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춤추다가, 죽어서야 춤이 그치는 ‘죽음의 춤’과 ‘무도병’의 역설적 사회병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춤출 수 없게끔 만드는 죽음, 죽임의 세력에 대항하는 춤, 이것이야말로 춤의 가장 강력한 주제가 아니겠는가 합니다. 반생명을 척결하고 살아 있음에 겨워 신령스러움의 생성활동인 엑스타시를 체험하는 여기서 우리의 독특한 신명론이 제기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연 상태계가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춤추지 않는 바다를 대신하여 춤추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새들을 대신하여 노래하는 신성한 의무를 지닙니다. 전통춤의 몇가지 예들 그렇다면 죽임, 죽음에 대결해서 죽어가는 것을 되살리는 생명의 춤은 과연 우리 전통 춤에서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춤은 무엇보다 신령함과의 만남과 교류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 ‘맞이굿춤’, ‘터벌임춤’ 입니다. 이는 상고대 시대의 동맹, 무천, 영고, 천군 등 제천의식을 신맞이 굿이라고도 일컫는 춤들입니다. 한해가 시작되는 정초나 농경의 일손을 잠시 놓은 5월이나 시월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흘 낮밤을 무리 지어 음주가무했다는 옛 기록에서 우리는 도도히 흘러넘치는 집단 신명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맞이굿은 무당춤으로 가서는 맨 첫머리에 신을 모시는 청신맞이, 또는 부정거리로서, 또 각종 민속놀이나 탈춤, 풍물에서 는 길놀이, 고사 등으로 잔존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러한 대목은 초입의 길닦음, 터울림이기도 하고 첫 말문 열음이기도 합니다. 특히 탈춤에서는 ‘벽사의 의식춤’이라고 해서 탈춤 첫머리에 꼭 들어가는 대목이 있습니다. 벽사 의식이란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예축의 의례’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놀이를 놀 판을 정갈히 하여 부정탄 것을 거두어 내 말끔히 씻어 내는 ‘판씻음’으로 놀이판을 엽니다. 그런데 이런 대목을 흔히는 중심부를 이끌어 내는 도입부 정도의 몫으로 보아 왔습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으로 보아 온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인 ‘마당’을 매개로 하여 거기에 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의 문제, 신의 문제, 우주의 문제, 온갖 문명사적문제가 동시에 초청되는 첫 대면의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의 자리를 토대로 해서 마을과 자연과 신과 우주와 역사와 사회가 동시에 초청, 결합되는 춤으로, 천지신명에 놀이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고하면서 유동하는 공생 에너지를 교류하고 교감하는 통과의례 대목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이 있지 않고서 본 행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술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우주의 생명과 교통하는 그 첫머리가 있지 않고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신의문제는 근본적으로 풀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은연중에 예시되어있는 겁니다. 그러기기에 이러한 우주적 생명력 위에 중심행사는 품기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바로 이 맞이굿 춤이야말로 온갖 춤의 생명력을 품고 있는 포태, 곧 춤의 씨앗을 기르고 낳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하여 신, 자연, 우주, 역사가 하나된 우주적 일체성 위에 인간의 삶을 얹어가며 사회적 영성 속에서 인간과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우주의 생명질서가 교감하는 바로 그 공간이야말로 세속적인 땅이면서 또한 거룩한 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당은 성속이 넘나드는 ‘성긴 틈’ 입니다. 이점에서 일년 내내 속된 것이 범접하지 못하는 교회나 몇몇 절간과는 다른 것입니다.
다음은 ‘죽음맞이 춤’입니다. 춤출 수 없는 죽음을, 춤출 수 없게 하는 죽임을 맞이하는 춤이므로 참으로 역설적인 춤입니다. 이런 춤의 하나로 봉산탈춤의 목중춤 중 첫머리에 나오는 첫 목춤을 들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봉산탈춤의 목중춤은 파계승 놀이입니다. 중이되 중이지 않음을 풍자하는 것입니다. 파계승 놀이는 민중이 지니고 있는 불교에 대한 태도를 놀이화한 것인데, 이는 타락한 불교에 대한 비판인지 아니면 불교에 대한 원천적인 비판인지, 민중이 불교에 대해서 적대적인가 우호적인가 그런 것을 곰곰이 따지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목중춤은 오입쟁이 춤으로 어디에도 매이지않는 육체적 활력을 구가하는 춤입니다. 이 파계승의 춤은 형식도덕에 대한 비판일수도 있겠지만 정신세계의 고답성 보다는 원초적인 육체성을 강조하는 춤이기도 합니다. 또 이 첫 목중춤은 몸을 땅 위네 엎드린 채 뒹굴기도 하지요. 3전 3복이라 하여 세 번 엎어지고 세 번 뒤집고 하는 요동치는 몸놀림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남녀간의 성적 결합을 묘사하는 듯한 그런 형상이기도 합니다. 양성의 교합이야말로 생명인 대지와 더불어 교감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생명력의 산출,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서 풍농, 풍어를 비는 유감주술로서 다산성을 통한 삶의 윤택함을 예측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 보자는 것은 멍석말이, 덕석말이로서의 뜻입니다. 이 춤은 억울하게 멍석말이로 죽어 가는 명다리의 춤이라는 것이지요.
사회적 연루에 의해 멍석말이를 당해 죽어 가는 과정을 엮어내고, 또 죽고 죽어 죽음으로 가서는 거기서 되살아 나오는 그런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처음에는 멍석말이로 죽어가는 몸짓처럼 파과적일 정도로 격렬한 근육춤의 동작으로 대지를 뒹글고 다닙니다. 바닥을 기면서, 엎어졌다, 뒤집어 졌다 하는 복무와 전무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윽고 몸을 추스려 근경을 살피며 3진 3퇴하면서 땅을 딛고 일어선 선춤으로 진행되고. 나중에는 땅의 세계에서 떨쳐 나와 허공을 가르며 높이 뛰어 오르는 도약의 춤으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춤사위와 일련의 과정을 보아서도 이 춤은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는 ‘반생명의 생명화’의 춤인 것입니다. 이 춤은 우리 춤에서 달리 견줄 데 없이 활달하고 춤폭이 크고 동작선이 장쾌합니다. 또 하나는 ‘병신춤’입니다. 이는 제대로 춤출 수 없는 이의 춤입니다. 한국민중은 모여 놀다가 신명이 극점에 오르면 놀던 사람 중 한두 사람은 꼭 병신춤 같은 것을 춥니다. 추는 사람도 구경꾼도 이를 보고 더욱 흥겨움에 젖어 듭니다. 이를 결코 신체불구자를 흉내내어 모멸하기 위해 추는 눔이 아닙니다. 춤출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춤출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춤이기에 육체해방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육체해방의 춤을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육체해방의 감흥을 감염시켜 숨어 있어 잠재된 신명을 스스로 돋구어 내게 합니다. 그것은 또한 불구자가 불구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자기폭로의 춤입니다. 배냇병신이든 사회적 불구이든 자기 몸이, 자기가 살고있는 사회가 비정상임을 허물 잡는 자기 비판의 춤입니다.
병신춤은 제대로 춤출 수 없는 춤이기에 제대로 춤출 수 있는 정상의 몸, 정상의 사회가 될 때까지 추어져야 될 가이없는 해방기운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옭죄인 몸이 풀러나가 정상의 몸짓을 되찾게 하고 이윽고 매인데 없이 활기차게 뛰는 춤으로 엮어진 병신춤의 구성방식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그리고 탈춤의 많은 부분은 병신춤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탈춤은 사회적 비정상을 척결하려는 민중적 염원이 누대를 통해 적충되어 있습니다. 탈춤은 단순한 의미의 계급갈등을 넘어선 생명회복의 문화적 전복입니다. 또 이 춤은 그늘진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원한 맺힌 어둠의 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춤은 그늘진 곳에서 밝은 곳으로 옮겨가는 신명의 춤입니다. 어디라 풀길 없이 맺힌 원한과 절절한 비통함의 속 그늘을 남김없이 끌어내 능청스럽게, 또 청승맞게, 그러면서 구성지고 푸지게도 웃겨주는 해학의 춤입니다. 보는 이는 웃다 웃다 마침내 왠지 눈물도 어릴 법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늘진 속에서의 신명이야말로 역동적인 신명일 뿐만 아니라 숨어 그늘진 끝에 밖으로 차단된 신명에 불지르는, 집단공유의 민중적 신명입니다. 그리하여 이윽고 누구나 더불어 춤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춤은 사람과 사람이 화해하고 친교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춤입니다.
그리고 ‘살풀이춤’ 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을 푼다는 것은 액땜이고, 액을 풀어 헤쳐 탈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추어지고 있는 살풀이춤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만 본래의 살풀이춤은 삶을 옭죄고 못살게 구는 살을 꼭 짚어 낸 후 거기에 대결하고 쟁투하면서 그것을 퇴치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풀이춤은 죽임인 살을 되죽이면서 획득하는 되살림의 춤입니다. 못살게 구는 적의 정체를 밝히고 이와 싸워 물리치는 역동적인 신명의 춤인 것입니다.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역신이 아내를 범접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죽음과 같은 심적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생겨났는지 잘 알아차린 처용은 춤으로서, 노래로서 해결하여 역신을 물리 쳤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 동원된 춤과 노래야말로, 역신을 감화시킨, 공격적 유화의 위력적인 존재로까지 나아간 처용의 춤이야말로 살풀이춤의 한 전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
것은 전투적 현실인식을 통한싸움의 춤이며 나아가 후덕한 마음 씀씀이 속의 화해와 나눔의 춤입니다. 무속춤에서 보여지는 살풀이춤도 살의 정체를 밝히어 액을 물리치는 춤이어서, 자신의 문제를 딴데 의탁해서 떠넘기는 비주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살풀이의 ‘풀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분풀이거나 정서해소가 아니라 어려운 삶의 과제를 풀어내 ‘물리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생명을 저해하고 있는 죽임의 세력인 살을 물리치는 살풀이춤이야말로 대립하고 있는 것 사이의 다툼을 상보적인 관계로 재정립시키면서 죽음조차도 불러 풀어 먹이는 지극한 생명공경의 춤입니다. 또 하나는 ‘칼춤’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칼춤이 있습니다. 황랑창무에서부터 궁중의 검기무, 그리고 상여 앞에서 추는 휘쟁이의 춤이라든지 기생방에서의 검무, 무당춤의 칼춤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들고 싶은 것은 수운 최제우님이 추셨다고 하는 ‘검결’입니다. 검결은 동학교도가 자기 심신수련의 한 방편으로 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농민군 훈련방식이나 모의 전투의 한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칼춤은 동학사상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 있는 춤입니다. 이 춤은 목숨을 수호하면서 또 잃을 수도 있는 춤입니다. 수운선생은 혹세무민죄로 몰려 대구장대에서 처형 당했습니다만 이때 ‘요상한 칼노래를 부르고 칼춤을 추어 사람을 현혹시켰다’ 라는 죄목이 덮씌워졌다고 합니다. 동학을 내세우고 혁신사상을 포지한 자로서 죽임에 이르게 된 죄목의 확증이 바로 칼노래 칼춤이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칼춤 한번 잘못 추어 목숨을 잃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칼춤이야말로 잘못 추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춤이라는 점에서 죽음과 삶이 서로 맞물려 교차하고 있는 역설적인 생명의 춤입니다. 그리고 그 칼춤의 내용은 오늘날 춤으로서는 남아 있지 않고 가사만 남아 있습니다만 우주변혁의 때가 드디어 도래하여 대장부로서 나서서 춤으로 우주만물을 뒤덮으니 어느 누군들 당할 자가 있겠는가‘ 라고 노래하는 장쾌한 변혁기운을 담고 있는 자기 결단의 춤이자 우주개혁의 춤입니다. 바로 그 웅지야말로 사회개혁과 우주개벽을 꿈꾸어 왔던 수운 선생의 집약된 삶의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은 원효대사가 추었다고 하는 무애무입니다.
지금은 궁중춤으로만 남아 있고 본래 원효대사가 추었던 무애무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춤의 내용을 어렴풋하게 짐작해 볼 수 있어 이 춤은 떨거지 병신춤이 아닌가 합니다. 이 춤은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의 청을 들어 파계행을 벌인 후 스스로 복성거가로 낮추어 칭하면서 거리 광대들의 춤과 노래를 배워 호리병박을 들고 그것을 흉내내면서 거기에 고답한 불교교리를 담았다고 합니다. 그 춤과 노래가 바로 무애가무인데요. 그 간단한 가락과 재담에 수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같이 부르고 춤을 더불어 춤으로써 저 멀리 있던 불교의 세계가 자기 몸안에, 일상생활 속에, 어쩌면 가장 미천한 인생들의 보잘 것 없는 삶 속에도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고 합니다. 말 저 너머의 것을 살아있는 몸짓으로 이야기하면서 원효는 떨거지 행각을 벌이면서 무애무라는 떨거지 병신춤을 일반 민중과 더불어 춤으로써 불교의 민중화를 꾀하였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다르지 않다는 진속일여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속그늘에 깔묻혀 찌들고 쩔은 바닥의 것이 거룩하다는 민중생명사상을 몸으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속그늘에 깔묻혀 찌들고 쩔은 바닥의 삶 속에 영성적인 것이 있고 거룩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춤과 노래로서 천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노동행위와 더불어 있는 ‘일출’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일출은 고역스러운 노동의 힘겨움을 덜어내고 노동의 효율성과 노동가치를 드높이는 육체적 사고의 춤이지요. 육체자체가 세계와 자아가 만나는 일차적 통로이므로 일춤의 육체적 사고란 어느 무엇보다 직접적이고 생생한 사유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것에 영성이 활동하고 있고,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기에 육체의 일이란 그것이 꼭 춤이 아닐지라도 육체안에 터져 확장되어 나오는 영험한 시간성을 내뿜고 있는 신령스러운 것이지요. 우리는 신나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한다고 보지 않고 놀고 있는 신령스러운 것이지요.
우리는 신나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한다고 보지 않고 놀고있다고 보게 됩니다. 춤추고 있다고 보게 됩니다. 일과 놀이와 춤의 무분별한 일치, 이것이 일춤이며 이때 일의 생산성과 생명력은 자기의 것인 동시에 우주운행 에너지와 서로 교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일춤의 신명이란 일을 일답게 하고 사람의 사람됨을 부추기는 원초적인 생명이어서 신명은 연행쟝르만의 예술체험도 아니고 예술행위자의 것만도 아닙니다. 그밖에도 심신수련하는 화랑도의 춤을 들 수 있는데 흔히 풍류라고 하지요. 유불선이 총합된 현묘지도인 풍류는 삼라만상과 더불어 자연대로 노닐어 심신을 맑게 하는 것인 동시에 생명의 정기를 섭취하는 ‘한밝사상’의 춤일 것입니다. 또 제각기 생긴 대로 마구잡이로 추는 줄타기 춤. 도굿대춤의 타고나 어쩌지 못할 신명이 있는가 하면,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줄타기춤, 작두타기의 목숨을 내건 전문예인의 ‘사로잡는’ 신명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복 입은 여인네들이 달밤에 둥글게 나선형을 그리며 추는 강강술래도 있습니다. 온갖 여성적인 것의 생생력을 품고 도는 강강술래는 생명질서의 근원으로 회귀하고 거기서 다시 풀려 나오는 우주운행의 춤입니다. 그리고 궁중춤의 대표격으로 춘앵전을 들 수 있습니다. 봄날 우짓는 새소리에 유감하여 화사한 정경을 그려내는 진귀한 웃음의 춤입니다. 사방 여섯자의 화문석 위에서 조그맣게 나고 들며 추는 이 춤은 가장 작은 그릇으로 가장 큰 것을 담아내는 무한생명의 우주질서를 그려내는 춤입니다. 우리 전통춤의 여러 갈래들과 종목들을 모두다 생명사상으로 포섭하여 다루기엔 무리한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생명기운을 포지하지 않은 춤이란 없다고도 해서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춤출 수 없는 죽음의 춤조차 생명회복을 위한 하나의 적극적인 역설이기도 하니까요.
우리 춤의 백미라고 하는 승무의 춤은 기운도 생명기운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생사고락의 온갖 세속 번뇌를 한 개 별빛에 모두우는 법열의 이 승무는 두고두고 더 살펴보고 헤아려 보아야 풀릴 수 있는 심오한 춤입니다. 신명론 재론 우리 춤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 생명사상은 새로운 민족예술의 방향타로 제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미학적 과제는 신명론입니다. 신명은 우주생명력과 교합된 상태로 확대된 자아입니다. 말하자면 우주 생명이 인간 내부에 지펴들어 자기 안에 우주가 확대되어 나오는 영성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신명은 우리의 샤머니즘적 전통에서 얘기하듯 신이 나고 들고 오르고 내리고 지펴 바람나는 접신 체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주질서가 나고 드는 내유신령 외유기화의 동학주문과도 통합니다, 자신이 한울님의 담지자임을 스스로 깨닫는 이마다 신명의 주체자임으로, 신명은 연행 예술가에게만, 농촌 정서 체험자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닌 만인 보편의 것입니다. 예술가란 말하자면 일반인의 은폐된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신명의 대행자입니다. 각자마다 내재된 신명을 은폐시키도록 몰고 간 삶의 액을 제거하는 사제의 역할을 맡아하는 것이지요. 오늘 어떠한 노래와 춤, 시와 음악, 그림과 예술이 있어 잠자는 신명을 불러일으킬 것인가가 당면한 민족예술의 근원적 과제입니다.
그리고 병신춤에서 보이는 그늘진 신명이라든지 살풀이춤에서 보이듯 전투적 현실 인식을 통한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신명 또한 있는 것이어서 신명은 단순한 한풀이나 소비적 정서가 아닙니다. 풍류의 신명, 전문 예인의 ‘사로잡는’ 신명뿐만 아니라 죽움맞이의 신명, 사회개혁과 우주개혁의 신명, 진속일여의 신명 등 전문명사적 전복을 꿈꾸는 신명을 두고 볼 때 오늘날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신명은 우주론적 신비주의거나 공상주의도 아니고 몽상주의. 몽환주의의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일춤의 신명은 말할것도 없고 두레 공동체를 통해 일하는 것이 영성적인 굿인 경우 신명은 육체성, 노동성과 더불어 공동체성, 자발성, 감염성, 전파성을 지닌 해방기운이 담지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두레굿춤이 사람 사는 곳 곳곳마다 추어질 때 신명론은 ‘지금 여기’ 있는데서 완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두레굿 춤은 오늘날 생활 속 실천의례입니다.
신명은 일과 놀이, 그리고 창작과 향수의 전일적 통일체로서 모든 생명을 포태하는 출산적 정취(mood)가 고조된 민중적 미의식의 모체입니다. 우리 춤의 형식원리이자 유형적 특징 인 ‘맺고 풂’, ‘어르고 닮’. 발디딤새로서의 비정비팔, 춤동작선으로서 3진3퇴, 3전3복, 사방치기, 연풍대 그리고 춤 리듬의 내재 원리로서의 3분박, 대삼소삼 등은 그것이 바로 우주 생명기운의 운행원리이자 영성적인 것이 빗어내는 무궁한 시 공간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명은 이러한 형식원리뿐만 아니라 예술창조 과정에서 영감이라든지 구상력, 열정, 환상, 표현 동기 등을 감싸돌고 있는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크고 작은 살림살이에 무한한 창조적 계기를 부여하는 우주적 생명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미학의 핵심과제는 역시 신명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
- 채희완(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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