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종조의 명신인 하연(河演)선생의 칠언절구를 소개합니다. 선생은 고려말에 태어나서 정몽주선생의 제자로 학문을 익혔다고 합니다. 이 시는 자신의 지나 온 삶을 돌아볼 때에, 부족하고 아쉬움이 많음을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왕조의 변혁기를 체험하고 새 왕조에서 벼슬길에 들어서서 많은 업적을 쌓은 분이 이런 심정으로 자기고백적인 시를 남겼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지 한번 쯤 반성해 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題 : 自詠(자영/혼자 읊조림)
少 也 潛 心 學 聖 賢 (소야잠심학성현)
老 來 猶 未 慕 神 仙 (노래유미모신선)
不 敏 自 知 難 進 就 (불민자지난진취)
徒 然 慷 慨 讀 遺 編 (도연강개독유편)
젊어서는 마음 다해 성현의 가르침 배웠으나,
나이 들어 가르침 따라 신선처럼 살지 못하네.
공업(功業) 이루기 어려움 이제 비로소 깨달아,
부질없이 슬프게 한탄하며 옛 글을 읽는다.
<어휘>
潛心 : 마음을 가다듬어 깊이 생각함
不敏 : 어리석음
進就 : 차차 일을 이루어 나아감
徒然 : 부질없이. 헛되이
慷慨 : 의분(義憤)에 북받치어 슬퍼하고 한탄함
<지은 이>
河演(하연, 1376-1453), 자는 淵亮(연량), 호는 敬齋(경재), 시호는 文孝(문효).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4세에 정몽주선생에게서 배우다.
19세에 성산이씨와 혼인하고, 21세(태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다. 이후 춘추관 수찬,사헌부 감찰 등의 淸要職(청요직/엘리트코스의 관직)과 육조(六曹)의 낭관(郎官- 佐郞, 正郞의 벼슬)을 두루 역임 후, 35세에 예빈시의 少尹(소윤), 39세에 사헌부의 掌令(장령)을 지내다.
세종 즉위 후에 본격적으로 고위직에 진출하여 예조와 병조의 참판, 대사헌, 형조와 이조의 수장인 판서를 역임하다.
중앙의 고위직 중간에는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의 각 감영의 주요 직책을 원만히 수행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공은 일반인들이 은퇴하는 시기인 65세에 종1품인 우찬성, 이듬해에 좌찬성을 거쳐 70세에 정1품인 우의정이 되었고, 75세에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왕에게 주청하여 물러나고, 2년 뒤 78세(단종 원년)에 별세하였다.
공은 중앙의 요직은 물론, 여러 지방의 지방관으로서도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특히 왕의 명을 받들어서 ‘경상도지리지’‘사서오경대전’ ‘성리대전’등의 서책을 편찬하였고, 허조선생과 함께‘오례의’를 편찬하는 등 세종조의 학문의 진흥을 이루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여러 해 동안 과거시험의 답안지를 평가하는 讀券官(독권관)을 맡아 이승소, 강희안, 신숙주, 성삼문 등 세종조의 문물을 다듬어 간 훌륭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나라 발전에 기여한 바 적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저의 선조이신 하연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 시흥시 소재 소산서원(하연 선생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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