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이젠 맘이 변해버렸나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20. 14:44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경향신문> 2006년 08월 02일 14:50:17

한 번 들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노래가 자신의 대표곡인 가수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리움만 쌓이네’의 여진이 그렇지 않을까. 노영심 등 많은 선후배 가수들이 리바이벌하여 불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노래의 진가가 증명된 것 아닌가. 리바이벌했지만, 그것들은 원래의 노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이 노래가 갖는 특유의 분위기는 커다란 변화를 주기에는 너무 강한 자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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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만 쌓이네’가 보여주는 상상력은 철저히 비회화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다정했던 사람이여,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 버렸나. 그리움만 남겨놓고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버렸나. 보라, 이처럼 어느 한 구절도 시각적인 풍경을 연출해 보여주지 않는다. 눈에 띄는 색채 이미지도 없고, 별다른 풍경도 없다. 그러면서도 듣는 이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련한 꿈을 꾸게 한다. 그 꿈은 선명한 시각적 풍경이 결여되어 있지만, 살짝 젖어 있는 매력적인 촉감으로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촉감에 기초한 상상력, 바슐라르가 말하는 바의 물질적 상상력의 매개체는 흔히 손이다. 그러니까 가수 여진은 떠나버린 임을 시선이 아닌 손, 다시 말하면 시각이 아닌 촉각의 그물망 속에 가둬두고 있다. 그리고 임이 그리울 때마다 망 속에서 임의 기억을 꺼내 어루만진다. 그래서일까. 고운 손으로 흰색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질 때의 촉감, 촉촉이 젖은 밀가루를 반죽할 때의 촉감이 노래 곳곳에 스며있다. ‘굳은 약속’이라는 노랫말의 한 구절에 유난히 눈이 가는 것도 같은 이유이며, ‘예전에는 우린 서로 사랑했는데, 이젠 맘이 변해버렸나’의 ‘맘’은 그 반죽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와 같은 촉각적 상상력이 남성적이라기보다 여성적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줄 안다. 예컨대 같은 탑을 두고서도 남성은 시각적인 형태를, 여성은 소재의 질감에 주목한다. 그래서 남성적 상상력은 묘사되어야 할 사건의 일종인 경우(=형식적 상상력)가 많고, 여성적 상상력은 무게로 또는 질감으로 느껴져야 할 무엇(=물질적 상상력)인 경우가 많다.

연인과의 이별을 두고서도 남성적 상상력과 여성적 상상력의 차이는 분명하다.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 세월 가버렸다고 이젠 나를 잊고서 멀리 멀리 떠나가는가. 이처럼 여진은 구체적인 정황이 완전히 삭제된 이별 그 자체를 노래한다. 여진에게는 이별마저도 느낌만으로 다가오는 질료의 일종인 것이다. 통상적으로 공간적 감각을 일깨워야 할 ‘멀리 멀리’마저도, 짙은 정감을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 너 하나만을 믿고 살았네. 그대만을 믿었네’에서 ‘믿다’는 ‘신뢰하다’라는 추상적인 의미와는 별 관련이 없다. 그것은 임에 대한 사랑을 반죽하는 손길을 형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상처 입은 내면을 어루만지는 소리이며, 아직도 여전한 사랑을 다듬이질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믿다’는 앞서 언급한 ‘굳다’와 동곡이음(同曲異音)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들으며, 내가 옛 여인네의 다듬이소리를 떠올린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았나 싶다. 밤이 깊어도 돌아올 줄 모르는 남정네를 기다리며 다듬이질을 하는 여인네의 한숨 섞인 민요 가락 말이다. 다듬이질이 피아노로 바뀐 것만 빼면 그럴듯한 상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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