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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희, <참새와 허수아비>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9. 18. 07:34

 

조정희, <참새와 허수아비>

 

 

사람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에로부터 많다. 예컨대 수어지교(水魚之交)는 아주 친한 사이를 물과 고기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를 개와 원숭이에 비유한 것이다.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관계는 물과 기름에 비유하기도 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사람 사이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자연의 일과 유비 추리해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사랑하는 이들 간의 관계라면 더 그렇지 않겠는가? 남성을 나비나 벌에,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 쉬운 예이다. 연리지는 조금 심오하다. 두 나무의 가지가 우연히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이 연리지인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연인 사이가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안타깝고, 애탈 때가 더 많은데, 그렇게 사연이 많은 연인 사이를 나타내는 비유로는 무엇이 적절할까?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는 대중가요가 제출한 매우 훌륭한 모범답안이 아닌가 싶다. 꽃과 나비의 관계, 참새와 허수아비의 관계는 참 다른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다. 우선 참새가 남성의 허수아비가 여성의 비유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여성은  꽃, 남성은 나비라고 유추하는 것에 반감을 갖는 사람이 많은 요즘이고 보면,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일리가 없지 않지만, 흔히들 그렇지 않은가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자.


그런데, 참새와 허수아비의 관계가 노랫말이 전하는 것처럼 참 묘한 관계이다. 허수아비는 참 외로운 존재이다. 넓은 들판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지푸라기 허수아비를 생각해 보라. 왠지 쓸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런데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참새가 허수아비 곁으로 찾아든다. 낱알로 배를 채울 셈으로 오는 것은 물론이다. 외로운 허수아비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다. 비록 누추하지만 자신의 어깨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나눴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참새는 허수아비 곁으로 찾아주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허수아비는 스스로 참새를 내�는다. 그게 허수아비에게 주어진 본연의 임무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시쳇말로 허수아비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자신의 타고난 운명은 참으로 슬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쩌랴 허수아비의 운명이 그런 것을. 그러면서도 허수아비는 참새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석양에 노을이 물들고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다시 참새가 찾아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를 두고, 고려가요 <가시리>나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여인네들이 인고(忍苦)를 통해 사랑을 성취하고자 했던 방식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석양에 노을이 물들 때’이고, 왜 하필이면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인가가 궁금하다. 후자는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인고의 세월이 단지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내적 성숙의 시간임을 뜻하는 것이라고. 만약 여인이 이와 달리 단지 서운해 하고 야속해 하기만 했다면, 임이 돌아온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이 원망으로 발전해 버린 지 오래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석양이라는 때는 무슨 의미일까? 어두워져서 참새에게 허수아비가 안 보이는 때라고 해석하고 말면 너무 단순하다. 남정네가 철이 들었을 때라고 해석해 볼만하다. 나쁘게 말하면 늙고 병들어 힘이 없어서, 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참새와 허수아비의 관계라는 외적 조건에 의해 주어진 운명을 성숙하게 극복할 수 있는 때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라, 그런데 이렇게 설명해 놓고 보니, 한 가지 놓친 게 있다. 허수아비도 아비일진대, 남성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남녀간계에서 누군 남자고 누군 여자고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