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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을 사랑하라-김연자, 아모르 파티

국어의 시작과 끝 2020. 12. 24. 05:11

1.3 김연자, ‘아모르 파티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인생이란 붓을 들고 서 무엇을 그려야할지

고민하고 방황하던 시간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말해 뭐해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대로 가면 돼

이제는 더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대로 하면 돼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말해 뭐해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대로 하면 돼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운명애(運命愛)’, ‘네 운명을 사랑하라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라틴어 ‘Amor fati’는 본디 <즐거운 학문>(프리드리히 니체, 1882)에 등장하는 철학 용어이다. 니체는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肯定)하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니체의 이 책은 단편적으로 툭툭 쏘아붙이는 것 같은 잠언 형식, 그러니까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철학서이기도 해서 이 말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속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란, 적어도 나의 어쭙잖은 식견으로는, 쉽지 않다. 그러니 여기서 요령 있게 그것을 풀어 설명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생각은 애초부터 없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인 노래 제목에서부터 표나게 드러나는 것이지만, 노랫말의 주제가 인생론의 일종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만큼은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최희준, <하숙생>), ”인생은 생방송, 홀로 드라마, 되돌릴 수 없는 이야기“(송대관, <인생은 생방송>”와 유사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 둘만 예로 들었지만 이렇듯 인생론을 주제로 하는 대중가요가 참으로 허다하다. 그런데 대중가요의 이런 면은 노랫말을 시()와 견주어 말할 때, 그 예술적 가치를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근거가 되고 있기도 하다. ‘어설픈 교훈주의’, 통속적인 인생철학에 불과한 것이라서, 구절구절 이치에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너나없이 다 아는 이야기라서, 예술적·문학적 가치는 논할 것이 못 된다는 지적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치부하고 말면 대중이 왜 그런 노랫말에 공감하고, 그 노래를 그토록 애호하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해도 그런 비판을 조금 더 성의있게 설명하자면 이런 뜻일 것이다. 대중가요는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즉 철학자와 예술가는 둘 다 인생을 이야기하지만, 접근 방식이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철학자는 삶을 전체적으로 투시하는 방식(예컨대 지구는 둥글다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성의 힘을 빌려 삶의 본질적인 것에 주목하여 객관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와 달리 예술가는 삶을 어느 한 측면에서만 보며, 제한된 감각에 비치는 대로, 그때그때의 감정에 투영된 형태(예컨대 지구는 울퉁불퉁한 평면이다와 같은 방식)로 표현한다. 실제로 니체는 전자의 철학은 허상일 뿐이고 후자가 진정한 철학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다. “우리는 가장 사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삶의 시인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하면서. 그가 일견 산만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일기 형식의 에세이로 자신의 철학을 펼친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가요의 인생론이 미숙한 인생철학을 뛰어넘는 진정한 삶의 시(=니체가 말하는 진정한 철학)가 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모르 파티의 어떤 면이 어설픈 인생론이 아닌 살아 있는 시()가 될 수 있게 했을까? 관조자의 미망(迷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상한 인간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생각을 펼칠 때 인생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아 그럴싸한 설()이나 비유(比喩)를 늘어놓기가 십상이다. 스스로를 인생이라는 거대한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 정도로 자리매김하면서 말이다. 자신을 관조적 사유의 주체로 설정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이 사유하는 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삶을 창작하고 또 계속하여 써 내려가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인간이란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주체이지, ‘인생이라는 무대를 관조하며 이해하는 주체가 아님에도 말이다.

아모르 파티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통속적인 인생론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관조하는 자의 시선(죽은 인생론)으로 옮아가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의 자리(살아 있는 인생의 시)로 옮아간다는 데에 이 노래의 매력이 있다.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는 노랫말이 이 노래의 무게 중심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생을 관조하지 말라는 것, 그냥 감정에 충실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운명(運命)’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인생의 필연적 흐름으로 마음속으로 받아들인 보이지 않는 삶의 궤도(마치 철길과 같은)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우연히던져진(=태어난)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숱한 우연들(이를테면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다기한 풍파들) 아래에 드리워진 보이지 않는 궤도(軌道)’와 같은 것이 운명이다. 또 그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運命愛)’는 그 보이지 않는 길을 인정하고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인간은 지나온 길은 보이지만 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경험이 궤도의 존재를 알게 하지만, 그것을 예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가 ()’으로 회귀한다는 결말은 알지만, 앞으로 펼쳐질 길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온 삶의 궤적에서 겪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숱한 우연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불행한 것인가? 아니다. 인생은 한 편의 소설이고, 드라마이고, 생방송이고, 나그넷길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흐름을 미리 알아 버린다면 그 소설은 맹탕이 되어 버리는 것이 이치이지 않은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궁금해야 드라마가 흥미진진한 법이 아닌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지금까지보다 더 재미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는 것이며, ‘인생은 지금이다.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는 것이다. 그래야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인 것이다.